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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n 07. 2018

아름다운 생의 간격

영화 <A Simple Life> (2011)

  Simple is Best! 오래전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다. '심플 라이프'라는 글자는 텍스트의 맥락에 따른 함의를 떠나 내 삶의 모토이자 지향하는 태도로 자리 잡았다. 사실 이 영화와 내가 추구하는 '심플 라이프'는 하등 관련이 없다. 같은 글자 다른 느낌이랄까. 그렇게 기대 없이 본 영화는 의외로 기대 이상이었는데, 뭉클한 감동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매우 현실적인 삶의 비전을 본 느낌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홍콩의 유명한 영화 제작자 로저 리와 그의 집에서 60년 동안 가정부로 지낸 아타오의 이야기다. 미혼인 로저는 20대의 유학기간을 제외하고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타오와 한 집에서 살았다. 바쁘고 출장이 잦은 그는 무심한 노총각 아들이 그렇듯, 아타오를 밥 해주고 살림해주는 늙은 엄마 정도로 여긴다. 딱히 예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살갑지도 않다. 늙은 가정부는 로저가 먹고 싶다는 음식을 하며, 무료한 집에서 그림자처럼 살림만 한다. 그러던 아타오가 중풍으로 쓰러지자 로저는 붙박이 가구 같았던 그녀의 존재를 새삼 자각한다. 아타오는 부담되기 싫다며 요양병원으로 가겠다 하고, 현실적으로 병구완을 하기 힘든 로저는 비용을 감당하겠다며 그녀의 뜻을 따른다. 이상적인 상황은 아닐지라도, 서로의 부담을 최소화하고 현실적인 방법을 모색한 부모 자식을 보는 듯했다.   


요양 병원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로저와 외출한 아타오


  아타오가 지내는 노인 요양 병원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노령화 사회 홍콩의 현실을 비정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게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돈이 없어 자식에게 괄시받는 노인도 있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노인도 있다. 그들을 응시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폭력적이진 않지만,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어쩔 수 없이 담고 있다. 노인들은 보여주기용 봉사 대상이 되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기도 한다. 구급차에 실려가야 벗어날 수 있는 생의 종착점이라는 면에선 암울하기도 하다. 그래도 최소한의 돌봄과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원해서 지내는 곳은 아니겠지만, 혼자 살 수 없는 병든 노인들에겐 그나마 요양 병원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아타오는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로저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지만 부담 주지 않으려 신경 쓴다. 로저 또한 그녀의 양아들이 되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한다. 이들이 정기적으로 만나 밥을 먹고, 얘기를 하고, 용돈을 주고받는 일상은 특별한 감동이나 연민보다는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한다. 이런 이상적인 간격을 유지하는 건, 여느 엄마와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예의와 배려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픈 노모가 오래간만에 찾아온 바쁜 아들에게 장가 언제 갈 거냐고 잔소리하거나, 왜 자주 안 오냐고 닦달하는 모습을 보지 않아서 좋았다. 그런 지청구가 늙은 부모의 사랑 표현일 수 있지만, 때에 따라선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사랑의 등가 법칙은 부모 자식 간에 극단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다 크다 못해 늙어가는 자식을 걱정하는 더 많이 늙은 부모의 애정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과 숨막힘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자식에게 일방적으로 퍼부은 사랑을 돌려받지 못했다 싶으면 원망과 한탄으로 쏟아낸다. 자식 또한 약해진 부모를 부담스러워하며 한없이 괴로워한다. 서로를 허물없어야 하는 사이로 규정하는데서 오는 폐해다. 그런 합의는 쌍방이 정식으로 한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점점 약해지는 아타오를 돌보는 로저

  로저와 아타오를 보면서 부모 자식 간에도 추억을 담백하게 얘기할 수 있는 적절한 간격과 예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로저는 아타오에게 아들 노릇을 하지만, 명절 가족 모임에 그녀를 동반하진 않는다. 로저의 가족들도 아타오를 걱정하지만 감당하지 못할 관심과 신경은 접어둔다. 아타오는 혼자 병원에 남아 쓸쓸해 하지만 로저를 원망하지 않는다. 로저는 그녀를 자신이 제작한 영화 시사회에 초대하고, 그녀는 쓸데없이 과하게 감격하며 호들갑 떨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적절한 간격과 예의 없이는 불가능한 광경이다. 이 이상적인 간격의 절정은 아타오의 연명 치료를 결정하는 로저의 모습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컵라면을 먹는 시간 동안 고민한 후, 예정된 출장을 감행하겠다 결정하고 의사에게 약물 투여를 중단시킨다. 자칫 메말라 보일 수 있는 이 시퀀스는 로저가 아타오에 대한 결정을 끝까지 자기 소관으로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자식이 아니고서는 부모의 생사를 그렇게 결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는 힘들고 막중한 책임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떠안으며 아타오의 마지막을 책임진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대신 담담한 재미를 느꼈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로저의 상황이 된다면 그가 한 것처럼 하고 싶고, 아타오의 상황이 된다면 그녀가 한 것처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 둘이 서로에게 한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적절한 거리를 두고 싶다. 그렇게 내 인생과, 내 곁에 있는 누군가의 인생이 단순하고 명쾌해지길 희망한다. 우리는 누구나 늙고 병들고, 또 한때는 그걸 감당하고 책임지는 생의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필연적인 권리와 의무를 아름답게 행사하려면 서로 생의 간격을 침범하지 않는 예의와 배려를 가질 필요가 있다. 가족이라도 당연한 건 없다. 세상에 허물없는 사이도 없다. 특히 부모 자식 간의 불화와 갈등은 누군가 한쪽이, 혹은 쌍방이 허물없다고 착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사랑한다면 적당히 떨어져야 한다. 그게 '수프가 식지 않는 거리'든 '한 달에 한 번이든' 내 삶이 온전해지는 간격이어야 다른 사람도 배려할 수 있다. '심플 라이프'는 평생 변하지 않는 이상적인 간격이 존재하는 삶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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