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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n 11. 2018

우리는 부모와 결혼한 적도 없다!

영화  <The Family Fang> (2015)


  모든 자식은 부모를 전복하기 위해 태어난다. 부모의 삶이 아무리 훌륭하고 모범적이라도 자식은 부모와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정 반대의 삶을 살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부모가 훌륭하건 아니건 자식들은 '지X 총량의 법칙'에 의거, 평생 일정 분량의 반항과 일탈로 부모 속을 썩이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어느 순간, 머리가 크고 부모에게 배울 점이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자식들은 부모를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부모 쪽보다 자식 쪽에서 결단을 내리고 탯줄을 끊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자식이 부모를 끔찍이 벗어나고 싶어 하는 건, 부모의 잘못이 아니다. 자연의 법칙이고 생명체의 본능에 가깝다. 그나마 사람이라도 되니까 (더 이상 성장에 도움받을 일이 없는) 늙은 부모를 보고 사는 것이지 동물의 세계에선 어림도 없다. 부모 역시 그들의 부모에게서 그런 식으로 탈출해 자신들만의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았다.




   평생 예술을 빙자한 해괴한 퍼포먼스를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 A와 아이 B. 애니와 벡스터라는 이름보다 A와 B라는 기호를 달고 퍼포먼스의 구성원으로 살았던 이들은 성인이 되어 부모와 떨어져 지낸다. 하지만 애니와 벡스터의 삶은 전위적인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애니는 삼류 배우로 전락하기 직전이고, 벡스터는 소설가인데 후속작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독특한 악명을 지닌 부모의 아우라에 지배당하고 있다.

 

기이하고 요상한 패밀리


  부모에게서 간신히 분리되어 나온 이들이, 성인이 된 아이 B의 사고를 계기로 다시 뭉치게 된다. 여전히 해괴한 행위 예술과 일상을 섞어버리는 부모의 모습에 애니는 분통을 터뜨리고, 벡스터는 점점 무기력해진다. 이들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부모가 자신들에게 시킨 거역할 수 없는 퍼포먼스가 삶을 어떻게 피폐하게 했는지 되짚어 본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행위에 끌려들어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그들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부모의 장대한 빅 픽처에 말려든다. 사고를 가장해 자신들의 죽음마저 퍼포먼스로 처리하는 부모. 그리고 이 플랜을 위해 십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행되어 온 이 가정의 비정상적인 행태에 애니와 벡스터는 경악한다.


성인이 된 애니와 벡스터.


  이 영화 속의 부모는 매우 극단적이다. 이들이 하는 퍼포먼스의 예술적 가치와는 별개로 자식들을 도구(?)로 이용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자아가 생기는 순간부터 확실히 불행했다고 토로한다. 부모들이 내세우는 예술적 행위는 삶을 위한 예술이 아닌, 예술을 위해 복무하는 삶이 되어 가족의 불화를 부추긴다.


  이 부모의 행위 기저에 있는 마인드, 즉 자식과의 끈끈한 유대와 천륜을 자신들 내키는 대로 이용하고, 자식들을 지배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전복되어야 마땅하다. 사실 이런 부모 자식 간의 갈등은 정도와 양상만 다를 뿐 어느 가정에서나 있는 전형적인 것이다. 부모는 자신들의 뜻을 따르지 않는 머리 큰 자식을 괘씸하게 여기고, 자식들은 낳고 키웠다는 이유로 은연중에 자식의 삶을 쥐고 흔들려는 부모의 마인드를 야만적이라 생각한다. 이런 갈등을 최소화하려면 부모 자식이 합리적으로 삶을 분리하고 이별해야 한다. 지구 상의 다른 생명체처럼 말이다. 늙은 부모는 다 큰 자식을 돌볼 생각 말고 집착을 버리고, 다 큰 자식 또한 부모에 대한 의존심을 버리고 독립적으로 살아야 한다. 이 경계를 잘못 넘나들어 남보다 못한 가족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 흔하게 본다.  


오랜만에 함께 한 Fang 패밀리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이 '부모와 이혼하는 법'이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이혼은 결혼을 전제로 했을 때 성립하기 때문이다. 결혼은 배우자를 내가 선택한다는 데서, 내 삶의 주체적 결정권자로 행하는 인생 최대의 퍼포먼스다. 이혼 또한 내 선택에 따른 행위다. 부모는 내가 선택할 수 없다. 자식 또한 마찬가지다. 부모가 자식을 낳을지 말지, 몇 명을 낳아 키울지 선택할 순 있지만, 누굴 낳아 키울지에 대한 선택의 여지는 없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부모와의 이별을 '이혼'으로 전환시킨 건, 이 영화 속의 자식들이 그만큼 단호하고 주체적인 선택을 해야만 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가 저런 부모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싶을 정도다.


부모의 이해할 수 없는 삶에서 벗어나는 애니와 벡스터


  애니와 벡스터 역시 세상의 모든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먼저 부모의 손을 놓는다. 그게 이별이든 이혼이든, 그들은 부모에게 벗어난 이후 자신의 삶에 무사히 안착한다. 이렇게 말하면 부모가 자식의 삶에 방해만 되는 불순한 존재로 오해받기 쉽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렇지는 않다. 부모 때문에 자식은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다. 문제는 자식의 성장 이후다. 자식을 잘 독립시키는 게 부모의 마지막 과업이다. 이걸 못해 평생 애면글면하는 세상의 많은 부모들은 눈에 눈물 마를 날이 없고 가슴에 원망과 분노가 넘쳐난다. 잘, 원만하게 떨어뜨리지 못해서 그렇다. 객관적으로 좋은 부모든 안 좋은 부모든, 모든 자식은 부모를 떠나야만 날갯짓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를 배신하고 날아오르는 건 자식들의 숙명이다. 부모는 날갯짓하는 자식을 보며 배신감에 떨거나 서운해할 필요가 없다. 머지않아 자식들도  그들의 자식에게 그런 식으로 배신당하고 전복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부모와 이혼할 수 없다. 부모와 결혼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설사 결혼처럼 선택할 수 있다 해도, 자신의 부모를 선택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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