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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n 14. 2018

엄마 노릇, 어디까지 해봤니?

영화 <당신의 부탁>  (2018)

  아무리 해도 마르지 않는 엄마 이야기, 여기에 보태는 또 하나의 우물 같은 영화가 있다. 엄마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부지불식간에 엄마가 된 여자들의 이야기다.


  효진은 남편의 전처소생인 아들을 받아들이며 엄마가 된다. 원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죽은 남편의 '무언의 부탁'이라 여겼으니까. 그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엄마들의 군상은, 세상에 엄마의 숫자만큼 다양한 손맛이 있다는 말처럼, 믿기 힘들지만 적나라한 실체로 '엄마들'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서른두 살 효진이 열여섯 살 종욱의 엄마가 된다는 건, 평범한 상상력으론 예상하기 힘든 '사고' 수준의 사건이다. 그녀는 사랑했던 (죽은) 남편의 자식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흔쾌히 기뻐하지도, 격렬히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녀가 정 없는 종욱에게 너무 잘 하려 위선 떨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예전에 효진은 아이를 가졌지만 유산해서 잃었다.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여자에게, 뒤늦게 그것도 다 큰 아이를 상대로 모성을 쥐어짜 보라고 강요하는 건 잔인한 부탁이다. 효진과 종욱은 서로를 이해하려 인위적으로 노력하기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종욱은 친엄마를 찾아다니고, 효진은 굳이 말리지 않고 도와주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 친엄마는 존재하지 않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서로 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인다. 두 사람은 각자 잃어버린 연결고리에 의해 한 줄로 엮인다. 종욱에겐 아빠가, 효진에겐 남편이, 그렇게 둘을 묶어놓는다. 매듭을 풀지 말지는 두 사람이 알아서 할 것이다. 아빠와 남편을 같이 애도하는 의식을 치르는 한, 두 사람은 담담하고 조금은 어색한 모자 관계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효진과 종욱


  효진의 엄마는 억척스럽지만 속정 깊은 전형적인 엄마다. '너만 안 생겼으면 이렇게 살지 않았다'는 신세 한탄을 습관처럼 쏟아낸다. 이 늙은 엄마는 살갑지 않은 딸에게 자신의 억울한 인생을 퍼붓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자신의 희생과 노고를 달래주어야 할 딸이, 지겨우니 제발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멈추지 못한다. 냉정하게 말하면, 효진 엄마는 억울해하면 안 된다. 희생이든 노고든 그녀가 선택한 것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때가 되면 누구나 저절로 하는 일이 아닌, 엄연한 주체적 행위다. 힘들고 지난한 고생을 했더라도 자식으로 인한 기쁨과 보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엄마의 사랑과 희생은 본인 입으로 다 뱉어내 너덜너덜해지기 전이 훨씬 더 아름답고 숭고해 보인다. 그렇게 일일이 상기시켜 주지 않아도 알만한 자식들은 다 안다. 이 엄마는 자식을 지치게 하지만 연민도 불러일으킨다. 한탄하면서도 자식만 바라보고 사는 엄마를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엄마가 그거밖에 안 돼서 그런 인생을 산 것뿐이라는, 거칠게 쏘아붙이는 효진의 말은 진실이라서 더 안타깝다. 엄마라는 정체성 밖에 남아있지 않은 늙은 여자는 어디서 억울한 인생을 보상받아야 하나. 아니, 그걸 왜 억울해해야 하나. 엄마의 희생이 갚아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긴 한 건가. 낳은 자식을 도로 뱃속에 집어넣고 새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한다면, 효진 엄마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주미와 종욱

  10대에 아기를 가진 종욱의 친구 주미는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엄마 노릇을 포기한다. 어리지만 주체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이 아이가 처한 상황에서, 아기는 낳은 엄마가 제일 잘 키울 수 있다는 말은 순진한 환상에 가깝다. 그녀는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에 대처하며 자신과 아이를 위해 나름 최선의 선택을 한다. 주미의 선택이 아이와 그녀 자신에게 어떤 삶을 살게 할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엄마가 되는 걸 실수로 여기고 자학하는 걸 멈추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을 거라 이해할 할 뿐이다.    


  불임인 서영은 철없는 십 대가 낳은 아이의 엄마가 되려 한다. 아이를 못 낳는다고 엄마 자격이 없는 건 아니다. 남편이 있는 안정적인 가정과 아이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은 그녀를 좋은 엄마로 만들어 줄 수 있지만, 막상 그녀가 자기가 낳지 않은 아이를 데려와 어떻게 키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 또한 엄마가 되는 또 하나의 길이고 가능성이다.


  효진의 친구 미란은 결혼해 아이를 출산했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엄마가 된 그녀는 갓난아이가 벌써부터 고집이 장난 아니라며 웃는다. 앞으로 파란만장할 그녀의 육아가 예상된다. 엄마가 되는 가장 노멀한 길을 택했지만, 그녀의 개별적 인생에서 육아는 결코 노멀하지 않을 것이다.


  무당이 된 여자 연화에게도 엄마였던 시절이 있었다. 자기가 낳은 아이는 아니지만, 어린아이를 키웠던 그녀는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온 종욱을 엄마처럼 뜨겁게 보듬어준다. 한때 지녔던 엄마의 정체성은 신내림을 받으면서 사라졌지만, 다시 만난 아들을 보자 일시적으로나마 되살아난다. 엄마라는 정체성은 영원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영구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연화가 보여준 엄마는 새엄마도 아니고 친엄마도 아닌, 시기적으로 어중간한 위치에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엄마지만, 한 아이의 마음에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여자는 엄마인가 아닌가. 그냥 한 때 엄마였던 사람인가. 그럼 지금 종욱을 안아주는 건 누구인가.         

  

엄마가 된 여자와 아들이 된 소년


  세상에 있는 엄마의 숫자만큼 엄마의 손맛이 존재한다는 건 거짓말이다. 모든 엄마들이 음식을 잘 하고 고유의 손맛까지 갖춰야 한다는 건 억지다. 음식을 잘 하는 엄마도 있고, 못하는 엄마도 있고, 아예 안 하는 엄마도 있다. 그렇다면 엄마의 숫자만큼 손맛이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게 마땅하다. 엄마는 각자 형편에 맞게 나름의 정체성을 지니는 개별적 인간이다. 신이 대신해 세상에 내보냈다느니, 모성은 타고난다느니 하는 강요와 억측으로 엄마들을 비참하게 또 의기소침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이 영화에 나오는 엄마들처럼 다양한 정체성이 인정받을 때, 세상의 자식들과 엄마들 사이가 좀 더 유연해지고 편안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엄마 혼자 잘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이 영화의 화면 밖에 있는 아빠의 지지와 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당신의 부탁'은 엄마가 누군가에게 들어야 하는 부탁이 아니라, 엄마가 자식들에게 그리고 세상에 하는 부탁이었으면 한다. 이상적인 엄마 노릇을 강요하지 말라는 부탁, 나름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있으니 신화적인 모성을 요구하는 건 집어치우라는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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