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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n 15. 2018

멋지지만 않은 신세계

영화 <Zootopia> (2016)


  2년 전, 같은 영화를 보기 위해 두 번이나 영화관에 간 적이 있다. 각각 다른 조카를 데리고 가서 봤는데, 한 번도 끝까지 보지 못한 영화가 『주토피아』다. 내 옆의 어린이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열광했지만, 현란하고 스릴 있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난 번번이 잠들고 말았다. 결코 지루해서 그런 건 아니다. 도시(동물들이 사는 도시일지라도)가 배경인 애니메이티드 필름을 볼 때면, 그 매끈하고 세련된 색감과 디자인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곳은 미세 먼지 하나 없고, 땅에 떨어진 과자도 주워 먹을 수 있을 만큼 청정구역으로 느껴진다. 하물며 유토피아라니. 이 영화를 안 보면 한이 될 것 같아,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잠들지 않고 끝까지 봤다.



  동물계의 먹이사슬 중 비교적 아래에 위치한 토끼는 번식력이 강한 대신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기 쉬운 초식동물이다. 작고 약한 천성을 가진 토끼 주디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경찰이 된다. 넌 안돼, 라는 주위의 만류도 그녀를 막지 못한다. 집념이 대단한 주디는 동물 버전의 개룡녀다. 게다 여자 토끼다. 그녀가 대도시 남성 위주의 집단에 뛰어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대충 예상이 된다.


  주디가 고향을 떠나 도착한 주토피아는 세련되고 현대적인 최첨단 도시다.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을 가볍게 뛰어넘은 듯, 손가락만 한 설치류부터 거대한 맹수까지 질서 있게 공존한다. 동물들은 종에 따라 사는 구역이 나뉘어 있고, 각각 특성에 맞는 직업군에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공존의 세계는, 엄격한 위계와 동물들의 본성을 거세시켜 유지되는 위태로운 질서를 전제로 한다. 당장 주디는 직장에서 성차별과 종차별을 받는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현실은 더 살벌하다. 유리천장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고압적인 상사의 명령, 남자 동료들의 차별, 태생의 한계에서 오는 절망 등. 그래도 주디는 주인공답게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주디는 주차 딱지를 끊다가 불법 아이스크림 제조업자 여우 닉을 만난다. 여우 트라우마가 있는 그녀가 그와 어떤 인연으로 엮이게 될지 기대된다. 주디는 자신에게 사건을 배당하지 않는 서장에게 항명하다 동물 실종 사건을 맡는다. 그리고 닉에게 파트너십을 제안한다. 주디가 의욕을 가지고 수사하는 건 좋은데, 그녀 역시 닉을 끌어들이기 위해 협박하며 회유한다. 청렴한 경찰까진 바라지 않았지만, 주디 역시 미국 영화에 자주 나오는, 능력이 뛰어나고 잔머리는 더 뛰어난 익살스러운 경찰이 하는 짓을 그대로 한다. 주차 딱지 끊을 때 1초도 봐주지 않은 고지식함은 온데 간데 없이, 잔꾀와 임기응변으로 여우를 꼬여내어 범죄 소굴까지 동행한다. 이쯤 되면 누가 여우이고 누가 토끼인지 모르겠다. 범죄 소탕이 다른 사소한 범법행위보다 중요할지 모르겠지만 찝찝한 건 어쩔 수 없다.

  어쨌든 그녀가 쫓는 동물 실종 사건의 배후엔, 마약 비슷한 약물을 제조하는 지하 세계의 대부 같은 존재가 있고, 그들의 어두운 음모는 주토피아를 교란시킬 수 있는 커다란 위험이다. 그 음모란 맹수의 본성을 극대화시키는 약물을 동물들에게 투여해 주토피아를 파괴하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선 핵과 생화학무기가 가장 두려운 인류의 주적일지 모르겠지만, 이 동물의 낙원에선 야성과 본능이 가장 끔찍한 주적인 듯하다. 맹수와 육식 동물들이 본능대로 살면 도시는 정글로 변하고, 엄격한 공공질서 대신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절대불변의 체제가 될 테니 말이다. 주디와 닉은 환상의 파트너십을 자랑하며 범죄 음모와 배후를 밝혀내고 실종 동물들을 구한다.




  유토피아적 도시가 배경인 이 석연치 않은 영화는 동물 세계에 빗대어 인간 세상을 그리고 있다. 너무 뻔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난 미국 브랜드의 전시는 미국 자본으로 미국인이 만든 영화니 그러려니 한다. 섬처럼 떠있는 주토피아는 뉴욕 맨해튼이고, 화면 빽빽이 들어찬 각종 상표와 이미지는 글로벌 브랜드 로고다. 주인공을 비롯한 동물들은 아이폰을 쓰고, 각종 미국 영화와 미드를 패러디한 장면이 넘쳐난다.


  이 세련되고 매끄러운 영화의 재미와 별도로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이들이 깔끔하게 범죄를 소탕하고 다시 질서를 찾은 이후가 염려스럽기 때문이다. 차별과 편견을 극복한 개룡녀 주디의 집념과 성취는 우러러볼 만하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평화로운 공존을 지향하는 주토피아의 모토도 훌륭하다. 그런데 동물의 본성을 억제한 평화, 이상적인 질서를 위해 사는 지역을 나누는 제도가 얼마나 지켜질지 의문이다. 이 영화 속 종차별은 인종차별의 메타포라 할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강제로 억제하는 게 능사일까 싶다. 동물과 인간은 다르기 때문에 영화의 도식을 인간 세상에 그대로 투사하긴 무리가 있지만, 강제로 억제한 본성은 그 '강제'가 살짝만 느슨해져도 어마어마한 부작용으로 나타날 개연성이 있다.

  차별은 나쁘고, 특히 문명사회에서 인종 차별이 범죄가 되는 건 정당하지만, 그걸 방지하는 교육과 철학이 뒷받침되지 않은 억압과 강제가 얼마나 안전한 장치가 될지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 종차별 금지에 대해 수업하는 교실이 안 보여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건가. 순한 동물도 맹수로 만들고 야수의 본능을 부활시키는 약물처럼, 쉽고 간단하게 그 안전망이 뚫리는 제도라면 근본적인 회의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영화의 주제인 '누구든지 뭐든 될 수 있다(Anyone can be anything)'가 '초식동물도 약물만 투여하면 맹수로 돌변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보이지 않길 바란다. 겉으로는 종차별을 엄격히 금지하는 듯 보이는 이 도시에서, 초식동물 주디가 당한 부당한 대우와 닉이 어린 시절 편견에 희생된 일, 시장 비서인 벨웨더를 범죄자로 만든 구조적인 차별 문제는 또 다른 문제다.    



  주토피아가 진정한 동물들의 이상향이 되려면, 극단적인 질서를 추구하며 공존하는 사회를 보여주기 전에, 종의 특성에 따른 다양성부터 인정하는 모습이 나왔어야 하지 않나 싶다. 단지 사는 구역과 직업만 나누어 놓기보다는 말이다. 동물의 종에 따른 특징은 캐릭터로 드러나 있긴 하지만, 근본적인 생태적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지는 미지수다. 야수의 특성을 없앤 맹수가 초식동물과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건 아름다울지 몰라도 위태롭다. 야수의 본성을 무조건 거세하기보다 발전적으로 이용할 방법을 모색하는 게 자연의 질서도 지키고 종의 번식에도 기여할 것 같다. 평화로운 공존은 본성을 무조건 거세해서 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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