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이스 Jun 17. 2018

소통을 원하는 이들의 간절한 판타지!

영화 <on Body and Soul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2017)

  나는 1년 365일 중 360일은 꿈을 꾼다. 나머지 5일도 기억이 안 날 뿐, 꿈이라는 실체 없는 무의식 덩어리는 거의 매일 내 의식이 가장 취약한 시간을 들락거린다. 대부분 망상조차도 못 되는 의미 없는 생각의 파편이지만, 왜 이런 무의미한 잡념들로 내 하루가 시작되는지 궁금하다. 내 꿈이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내 의식을 은연중에 반영한 건 아닌가 미심쩍을 때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유치 찬란한 상념의 정체는 뭘까. 내 무의식이 이런 것이라면 심각할 것 까진 없지만 유쾌하지도 않다.




  꿈을 신비화하고 의미 부여하는 영화나 책은 일단 신뢰하지 않는다. 꿈으로 생을 예언하거나 운명을 진단하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데, 딱 그런 영화를 만났다. 국적도 모르고 본 헝가리 영화는 기묘한 남녀의 소통을 이야기한다. 관계에 질린 나이 많은 남자 엔드레와 관계를 전혀 못하는 젊은 여자 마리어는 소 도축공장에서 일하는 직장 동료 사이다. 인간을 위해 도축되고 절단되는 소를 디테일하게 보여주는 초반의 시퀀스는 도대체 이 영화가 뭘 말하려고 저러는가 싶었다. 살벌하고 잔인한 소의 도축이 두 남녀 관계에 어떤 의미로 작용하는지 영화를 다 본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현실적이지만 비인간적인 공간에서, 전혀 안 어울리는 두 남녀의 기적 같은 소통이 극적으로 보이긴 했다.


엔드레와 마리어


  어느 날 공장에서 가축의 교미 가루가 도난당한다. 도난당한 물품이 다른 것도 아니고 '교미 가루'라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강력한 최음제 성분이 든 교미 가루를 훔친 사람은 필요에 의해 도둑질했을 것이다. 인간이 동물의 교미 가루를 필요로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범죄의 목적이 아닌 다음에야, 안 되는 관계를 어떻게든 이루어 보려는 절박한 욕망에 시달리는 사람의 짓일 것이다. 경찰의 수사를 받은 공장 직원들은 상담사에게 심리 검사를 받는데, 그 과정에서 엔드레와 마리어는 같은 꿈을 꾼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각자 암사슴과 수사슴이 되어 겨울 산속에서 같이 물을 마시는 꿈이다. 같은 동물이지만, 도축공장의 소들과 자연 속의 사슴들 운명은 극적으로 다르다.



  엔드레는 왼쪽 팔이 불구다. 그는 젠틀하지만 매너리즘에 빠진 60대 남자다. 마리어는 접촉과 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자폐 성향을 가진 여자다. 성숙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동 심리상담사를 만나고, 정상적 연애를 못할 정도로 폐쇄적이다. 꿈을 통해 서로를 의식한 두 사람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남자는 여자에게 같은 장소에서 잠들어 보자고 제안한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 휴대폰을 사고 음악을 들으며 소통하려 한다. 상담사의 조언에 따라 음식을 통해 촉감을 발달시키고, 햇빛 속에 몸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엔드레는 딸 또래의 여자에게 끌리는 자신을 인정할 수 없어 한 발짝 물러난다. 마리어는 자신의 비정상적인 성격에 절망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왼쪽 팔목을 그은 그녀는 마침 걸려온 엔드레의 전화를 받고 기적적으로 회생한다.


  다시 만난 둘은 육체관계를 갖고 그날 밤엔 꿈을 꾸지 않는다. 그들이 같이 밤을 보내는 장면은 음악 하나 없이 단조로운 카메라의 시선만 반복되는 메마른 일상 그 자체다. 이 극적인 소통이 가감 없이 드러내는 현실은, 아름답지도 낭만적이도 않은 관계의 본질을 보는 듯했다. 꿈처럼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관계는 현실엔 없다. 완벽한 소통은 더군다나 불가능하다. 이해하고 노력해야만 유지되는 타인과의 잔인한 간격만 있을 뿐이다. 왼팔이 불구인 남자와 왼쪽 손목을 싸맨 여자는 그렇게 극적인 소통을 한 후 아침을 맞는다.


소통 장애를 겪는 마리어

  그들이 더 이상 같은 꿈을 꾸지 않는 날들이 어떻게 펼쳐질지 가늠되지 않는다. 여자는 여전히 결벽증이 있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무심한 시선으로 본다. 이들이 서로의 불구를 이해하고 소통한다면 아슬아슬할 망정 이 관계는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꿈이란 매개체 없이 비인간적이고 싸늘한 도축공장의 일상에서 서로를 어떻게 대할지 모르겠다. 교미 가루 도둑은 엔드레의 친구인 공장 직원으로 밝혀진다. 같은 공장에 근무하는 아내의 자유분방한 외도 때문에 극단적인 짓을 한 그 역시 소통을 절박하게 원하는 외로운 남자다. 이 살벌한 도축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엔드레와 마리어뿐만 아니라, 누구나 관계 부재에 시달리고 소통의 욕망에 괴로워한다.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정력적인 신입 남자 직원조차 마리어에게 거절당한다.


  이 도축공장은 살벌한 세상의 축소판이고, 소를 죽이고 절단 낸 직후에도 식욕을 느끼는 공장 직원들은 이상하고 잔인한 사람들이 아닌 평범한 세상 사람들일 뿐이다. 판타지 없이는 사랑이 불가능한 건가 싶어 씁쓸하지만, 같은 꿈을 꾸는 판타지를 소통의 욕망에 대한 메타포로 본다면, 그리 울적해할 일도 아니다. 누구나 타인과 같은 꿈을 꾸는 기적을 체험하는 건 아니지만, 같은 꿈을 꾸고 싶은 욕망을 가질 수는 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멋지지만 않은 신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