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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n 20. 2018

좀 살아본 어른이 쓴 맥 빠진 동화

영화 <레슬러> (2018)

  장래 희망은 아이들에게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니다. 다 자란 어른들, 삶에 지치고 인생이 저물어간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일수록 굳건하고 간절한 장래 희망이 필요하다. 어느 드라마에  '연애는 어른들의 장래 희망'이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희망의 장르를 꼭 그쪽으로 한정 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살다 보면 장르 불문하고 삶의 회한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뭘 하고 살았든 지나간 시간은 절절하게 아쉽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식을 낳는가 보다. 내 회한과 아쉬움을 전복시킬 살아 숨 쉬는 존재가 절실하니까.



  자식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는 부모들은 생을 탐색하고 정복하는 개척자다. 그들에게 잘 자란 자식의 성공은 탐험의 종착지이자 정상이다. 여기서 '잘 자란'이란 부모의 기대대로 자란 자식이다. 부모는 자신이 못 이룬 꿈을 자식이 대리로 이루어주길 바라며 전혀 다른 두 개의 꿈을 하나로 합체하고, 자식이 그걸 믿게끔 최면을 거는 신공을 발휘한다. 자신의 꿈과 아들의 꿈을 뭉뚱그려 염원하는 아들 바보 귀보도 그런 아빠 중 하나다. 레슬링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는 꿈은 자연스레 아들의 꿈으로 전가된다.

  스무 살짜리 딸이 친구의 아빠를 좋아한다는 말에 아연실색한 아빠는 그동안 어떤 탐험을 한 것일까. 20년 동안 키운 딸이 듣도 보도 못한 외계인처럼 미지의 영역으로 느껴질 때, 이 탐험을 포기해야 하나 아니면 새로 길을 만들어야 하나.

  40년을 키운 아들과 대화다운 대화를 못하는 늙은 엄마는 혼잣말로 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자식과 우격다짐하고 동문서답하는 게 그녀의 장래 희망은 아니었을 것이다.

  동성애자인 아들에게 너만 행복하면 된다고 말하는 고령의 아버진 어떤 장래 희망을 품었을까.



  영화에 나오는 부모들의 우여곡절은 짠하고 연민을 자아낸다. 전형적인 희생을 하는 부모도, 고루한 부모도, 파격적인 부모도, 내 부모의 모습이자 내 모습이다. 문제는 이들이 빚어내려 하는 공감과 연민이 자연스럽지 않고 덜컹거린다는 것이다.

  몸을 비비며 훈련하고 부대끼는 레슬링 부자의 사연은 신파와 코미디를 성의 없게 비벼놓은 듯 겉돈다. 부자의 갈등을 위해 들어간 아들 여자 친구와 삼각관계가 되는 파격적인 설정은, 파격만 있을 뿐 웃음도 감동도 심지어 충격도 주지 못한다. 스무 살짜리 여자애가 (남자 사람) 친구에게 네 엄마가 되고 싶다고 막말을 투척하는 건, 귀엽지도 엉뚱하지도 않다. 그냥 뜬금없고 황당하다. 그녀의 고백이 막말로 느껴질수 밖에 없는 건, 이 짝사랑이 설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유치하고 1차원적인 장난 수준이다. 당사자가 진지하지 않은데 (본인은 나름 진지할지 모르겠지만) 보는 사람이 이 관계에 몰입하길 바라는 건 무리다. 따라서 이 갈등은 있으나마나 한 무용지물같은 에피소드일 뿐이다. 귀보의 부성애는 나름 절절하지만 참신하지 않다. 자신과 자식의 꿈을 혼동하는 우격다짐은 공감을 주기 보다 그냥 짠하다. 귀보와 노모의 전형적인 관계도 안타까울 뿐이다. 귀보의 맞선녀는 왜 나온 건지 모르겠다. 웃기려고 한 거 같은데, 왜 웃겨야 하는지 조차 모르겠다. 이것저것 많은 걸 넣고 섞은 비빔밥을 먹었는데 배는 부르지만 맛이 없어 허탈한 느낌이랄까.



  이 영화는 좀 살아본 어른이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쓴 동화 같다. 그들의 장래 희망은 마냥 환상적이지 않다. 자신들도 체험 못한 교훈을 함부로 주지도 않는다. 용의주도해서 쉽게 해피엔딩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대신 세파에 찌든 만큼 적당히 몸 사리면서 은근히 자신들의 꿈을 투사한다. 삶에 갈등은 있지만 엔간히 부대끼면 봉합되고, 아이들은 기다려 주면 스스로 깨닫고 성장한다. 오해와 불화의 폭풍이 지나가면 더 큰 믿음과 희망으로 일상의 새 살이 돋아난다. 동화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이 동화가 너무 안일하게 뜬금없이 쓰였다는 게 문제다. 웃음과 감동과 참신함을 욱여넣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우러나오지 않은 이 영화는 안타깝고 슬픈 동화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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