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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Apr 20. 2018

끝이 있어 다행인 디스토피아

    

영화  'What Happened to Monday'


  세상엔 아름다운 것이 너무 많다. 특히 이 봄엔 더 그렇다. 미세먼지 속에 피어난 꽃만 봐도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직접 못 봐도 사진과 영상으로 전해지는 세상은 너무 아름다워 슬프기까지 하다. 어디 꽃뿐인가. 맛있는 음식도, 유려한 노래의 멜로디도, 무구한 아이들의 웃음도 우리를 더 살고 싶게 한다. 세상을 곧 하직하려는 사람이 한 숨의 호흡이라도 더 쉬고 싶어 하는 심정이 헤아려진다. 이런 아름다운 세상에 찬물을 끼얹는 건 다름 아닌 미래다.


  당장 내 안위도 불안하지만, 조금만 시야를 넓혀 범지구적으로 생각하면 앞날을 낙관하기 쉽지 않다. 우린 미세먼지 포비아에 사로잡혀 마스크 가격으로도 계층을 나눈다. ‘숨도 돈 있는 사람만 쉬라는 거냐' 이 말은 차라리 앙탈에 가깝다. 시리아 내전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가릴 것 없이 환경과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  


  영화와 소설은 이미 몇십 년, 몇 백 년 전부터 인류 미래에 대한 비관적 사례를 조목조목 보여줬다. 설마 저렇게 되겠어, 했던 것들이 그 설마를 뛰어넘어선 예도 많다. 그런 콘텐츠를 생산한 예언자들의 목적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이기적인 인간들에게 제발 이 꼴 나지 않게 정신 차리라고 경고한 것이다.



  가상현실인 게임 세계로 들어가 목숨 건 사투를 벌이는 영화 <주만지 2>는 지루할 틈 없는 오락 영화지만 끝까지 보지 못했다. 증강 현실이 실생활에 접목되어 이런 상황이 실현된다면, 난 그냥 집안의 모든 코드를 뽑아버릴 것이다. 그곳의 자연은 쾌청하고 오염물질이 없다 해도, 미세먼지를 호흡하고 미세 플라스틱 알갱이가 있는 물을 마실 수밖에 없는 이곳에서 지옥 체험하며 살 것이다. 그곳에서 각종 괴물들에 시달리며 목숨이 서너 개인 것처럼 다이내믹하게 사느니, 여기서 천천히 죽는 게 나을 거라는 나름 합리적 판단에서 내린 결론이다.


 <What Happened to Monday?> 이 영화는 지옥행 롤러코스터나 다름없다. 몇십 년 후 가상의 21세기, 인류는 환경오염으로 식량난에 직면한다. 선진국은 생물의 유전자 조작으로 식량난을 가뿐하게 해결하지만, 대신 기형아 출산이 증가한다. 결국 정부 수뇌부는 극심한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를 늦추기 위해 산아제한 정책을 시행한다. 한 가구에 한 자녀만 허용하는 이 정책은, 자연스럽게 번식을 통제하는 것이 아닌, 능력이 되든 안 되든 무조건 하나만 낳아 키우라는 반인간적인 억압이다. 허용되지 않은 두 번째 아이부터는 국가 기관이 관리한다. 그 관리라는 것의 정체는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아챘겠지만 스포일러라 여기서 밝히진 않겠다.          

  

  이 와중에 일곱 쌍둥이로 태어난 여자 아이들이 있다. 이들은 은신처에 숨어 살며 일주일에 하루씩 번갈아 밖으로 나간다. 그들은 인생의 1/7씩 나눠 가지며 하나의 자아로 살아가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다. 한 사람의 배신과 잘못된 생각은 전체를 위협하고, 그 와중에 이들이 마주치는 국가 기관의 끔찍실체는 차라리 먼저 죽은 사람이 부러울 정도다.  

은신처에 숨어 사는 일곱 쌍둥이


 이 영화는 아주 볼 만한 오락영화다. 이렇게 심장을 쫄깃하게 하는 여전사들을 근래 본 적이 없다. 거대한 공 기관에 대항하는 개인들의 처절한 사투는 통쾌한 대리만족까지 준다. 그런데 이들의 화끈한 액션보다 내 심장을 더 철렁하게 한 건, 이런 정책이 머지않아 실현될 것 같은 예감이다. 아니, 이미 실현됐다. 중국은 1980년대부터 한 자녀 정책을 실시해왔다. 그 나라도 지금은 저출산 기조로 돌아서자 정책을 수정했지만, 국가가 자녀수를 통제한다는 건 인간의 자연적 본성까지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예전에 구호로 외친 산아제한과 비슷하지만, 구호와 계도 차원이 아닌 법으로 강제하는 건 엄연히 다르다. 뭐가 나쁜가, 무턱대고 낳아 가난하게 사는 것보다 현명하다 할지도 모르겠다. 일면 그런 면도 있다. 하지 2세를 만든다는 건 국가나 사회를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닌, 생명을 가진 모든 생명체의 자연스러운 행위고 본능이다. 인간의 개체수는 국가나 사회를 위해 조절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염된 강물에선 물고기 개체수가 줄어들 듯, 인류가 살기 힘든 환경에선 자연스럽게 인구가 감소할 것이다. 그것 또한 인간이란 생명체의 자연스러운 생명 행위의 결과다. 생명 행위를 반인륜적 사상으로 통제하고 지배할 때, 인간은 인간이길 포기하게 되고 세상은 생명체를 잃게 될 것이다.

  

  일곱 쌍둥이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 중에 인상적인 게 있다. 금요일에만 나가야 하는 프라이데이가 룰을 어기고 월요일에 나갔다 손가락 하나를 잃고 들어온다. 아이들의 보호자인 할아버지는 그런 행동이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불같이 화내며 먼데이의 손가락마저 자른다. 월요일에 밖에서 다치고 온 아이는 곧 죽어도 먼데이여야만 의심받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퀀스를 보며 갸웃했다. 그냥 먼데이와 프라이데이를 바꾸면 되는 거 아닌가. 이왕 월요일에 나간 애가 다치고 왔으니, 그다음부턴 그 애가 먼데이가 되고, 먼데이는 금요일에만 나가는 프라이데이가 되면 될 텐데 하고 말이다.


  그러면 이 영화의 결말에 영향이 간다는 걸 나중에 깨닫긴 했지만, 어쨌든 손가락을 자르는 위험보다, 아이들의 요일을 바꾸는 부담이 훨씬 적을 거라는 생각은 영화의 개연성과 상관없이 지금도 변함없다.

어차피 이 아이들은 각자 바깥세상에서 보낸 하루를 모두 공유하는 끔찍한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이 영화는 <주만지>와 달리 끝까지 봤다. 안 볼 수가 없다. 현실과 달리 영화는 끝이 있어 참 다행이다. 이런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가 나를 겁줄 때마다 인간이 100년을 채 못 산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된다.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못 볼꼴을 볼 날이 성큼 다가올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홍채가 아이디를 대신하고, 손목에 칩을 이식해 휴대폰도 필요 없는 세상은 안 오길 빈다. 와도 아주 먼 미래에, 바람직한 방식으로 왔으면 싶다. 이미 홍채 인식은 실용화된 기술인데, 남의 주민등록증을 훔치는 대신 남의 안구를 적출해내는 그런 일은 제발 안 일어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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