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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Apr 27. 2018

나는 차별주의자인가?

차별을 차별하고 혐오를 혐오하려면


  내가 이 나라에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영위하는 한, 뼛속까지 이해할 수 없는 감정 중 하나가 인종차별에 대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단일 인종, 단일 민족 국가에서 벗어난지는 꽤 됐지만 피부로 실감하진 못한다. TV에서, 혹은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마주치는 외국인은 주변인이지 내 일상을 파고드는 존재는 아니다.


  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만, 과연 그럴까 싶다. 한 번도 인종차별을 당해본 적 없고, 차별할 여지가 있는 환경에 놓인 적도 없다. 막연하게 나는 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을 뿐이다. 인종뿐 아니라 나이 성별 지역 등 알게 모르게 조금씩 차별받고 차별했겠지만, 크게 인지하지 못하고 살았다.   



영화 <끝에서 시작되다 Same Kind of Different As Me> (2017)


  <끝에서 시작되다 SAME KIND OF DIFFERENT AS ME>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성공한 중산층 백인 남자가 흑인 노숙자를 만나 삶의 경계를 허물고 소통하는 이야기다. 미국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인종차별과 사회적 편견을 휴머니즘으로 승화시킨 이 작품은, 뻔하지만 감동적이다.   


  친구 하자고 다가오는 백인 남자에게 경계심을 풀지 않는 흑인 노숙자가 말한다. 백인들은 낚시할 때 힘들게 잡은 고기를 그냥 놔준다고. 백인 남자는, 그건 스포츠고 재미로 하는 거라서 그렇다고 한다. 흑인은, 우린 물고기를 잡으면 가져가 먹는다며, 백인들이 힘들게 잡은 물고기를 놔주는 게 거슬린다고 한다. 나 같은 흑인에게 다가와 손 내밀며 친구 하자고 하지만 재미로 낚다가 버릴 거라는 걸 안다고.  흑인은 아마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손을 내밀며 동정하는 백인들은, 마음은 닫은 채 자기가 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것만 주는 것이라는 걸. 먹을 걸 주고 몇 번 대화 상대가 되어 준다 해도, 그들은 결코 친구가 아니라는 걸. 낚시가 그들의 재미이고 스포츠이듯, 불쌍한 이방인은 그들에게 봉사와 선행의 대상이니 동등한 인간이 되고 싶으면 도움의 손길을 거부해야 한다는 걸.


  결론을 말하면, 백인 남자는 그날 이후 흑인 친구의 손을 잡고 평생 놓지 않는다. 그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던 건 아니다. 그는 좋은 환경에서 잘 자란, 선의를 가진 중산층 모범 시민이다. 불우한 흑인 노숙자를 동정하고 봉사할 정도의 교양은 갖췄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자신의 집이나 사교 클럽에 흑인을 데려갈 정도는 아니었다. 아내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하던 일이 어느 순간 진심으로 바뀌며 삶의 태도와 가치관이 변한다. 그가 이질적인 낯선 존재에게 경계를 허물게 된 계기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호하지만, 그는 타자를 내면으로 받아들이는 용기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약간의 의지만 갖고 있으면 누구나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용기 있는 행동은 때론 인생을 걸 만큼 모험을 필요로 한다.  

  지금 유럽은 난민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수용하자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이 팽팽히 대립하며 사회문제로 야기되고 있다. 보통 유럽인들이 난민을 거부하고 혐오하는 것이 사회적 비용 부담 때문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어떤 학자의 글을 보니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다른 것, 즉 이질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를 갖고 있다고 한다. 난민이 가난하고 잠재적 범죄자가 되기 쉬워서 거부하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자신들과 다르기 때문에 혐오한다는 것이다. 다른 국적, 인종, 언어, 민족, 종교 등. 수많은 다름이 두려움과 차별을 야기시킨다는 것이다. 그 학자의 의견은 비관적이다. 교육과 이성, 사회적 제도의 힘으로 차별과 혐오를 어느 정도 잠재울 순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잠재된 본성은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까.    


영화 <The Shape of Water> (2017)


  영화 <THE SHAPE OF WATER>는 인종 차별 정도는 껌이라 여겨질 만큼, 아주 다른 이질적인 두 존재의 소통을 보여준다. 말을 못 하는 여자와 괴생명체가 사랑을 나눈다. 말 그대로 메이크 러브까지 한다.


  여자는 미국 항공우주센터의 청소부다. 하는 일도 그렇지만, 벙어리라는 정체성은 보이지 않는 경계가 되어 그녀를 소외시킨다. 장애는 문명사회에서 극단적으로 대놓고 차별받는 정체성이다. 사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장애인을 배려하는 정책 자체가 이미 차별을 전제하고 있다.


  어느 날, 이 곳에 괴생명체가 들어온다. 어류와 파충류와 영장류를 이종 교배해 나온 듯한 이것의 정체는 그 누구도 모른다.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진 않지만, 감정을 이해하고 교감한다. 힘이 세고 거칠며 초능력도 있다. 이 괴생명체의 비주얼은 인간이, 인간이 아닌 지능을 가진 생명체에 가질 수 있는 혐오와 두려움, 거부와 공포를 모두 담아 형상화시킨 모양새다. 영화를 만든 주체가 '인간'이라는 걸 극명하게 보여준다.  


  소외된 여자와 이질적인 괴물은 서로를 한눈에 알아본다. 괴생명체를 죽일 계획을 알게 된 여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빼내어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킨다. 이 판타지 영화는 서로 다른 존재가 경계를 허무는 가장 극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어린 소년이 이티와 나누는 우정이나, 외계인과의 교신을 꿈꾸는 과학자의 열정은 이 커플 앞에선 좀 순진해 보인다. 여자는 괴생명체와 몸을 섞고 죽음까지 각오하며 그를 지킨다. 그 역시 그녀를 데리고 자신의 세계로 잠적한다.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곳에서 권태기 없이 서로를 꿀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며 잘 살 수 있을까.


  이 영화에서 괴생물체를 직접 간접적으로 돕는 이들은 모두 비주류다. 벙어리 여성은 말할 것도 없고, 흑인 하층민 여성, 소련에서 망명한 스파이 과학자, 단골 케이크 가게에서 쫓겨난 늙은 실업자가 그들이다. 이들은 60년대 미국 사회의 대표적인 이방인들이다. 와프스로 상징되는 백인 앵글로색슨 화이트 칼라 남성의 가족과 친구에 속하지 못하는 하층 계급이며 이류 시민이다. 이들이 이질적인 존재를 돕는다는 건, 너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석연치 않다. 없는 사람만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소외된 자만이 소외된 자를 이해한다는 건 누구의 주장이고 논리일까. 왜 일류 시민과 주류들은 이질적인 것에 대한 포용력과 인내가 희박한 것일까. 잃을 게 많아서? 그들이야 말로 교양과 지성과 부를 겸비한 일류시민인데, 이질적인 타자에게 가진 것을 좀 잃거나 나눠주는 게 큰 타격도 아닐 텐데, 어째서 그렇게 야박하고 몰인정한 야만인들로 돌변하는 것일까.


  힘없는 사람의 용기는 그래서 더 대단하고 안쓰러워 보인다. 이 영화에서 극단적인 용기를 낸 벙어리 여인처럼.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만일 이 영화의 속편이 나온다면 그 둘 사이에 태어난 더 이상하고 이질적인 생명체인 이들의 2세가 등장하지 않을까 싶다. 그 애(?)는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인간들에게 또 얼마나 모진 핍박과 학대를 받을지, 차라리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게 나을 듯싶다.


  이질적인 것에 대한 나의 태도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걸 맞닥뜨리는 상황에 닥쳐봐야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알 수 있지 않을까.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본능이라면, 인류는 절망적이다. 그 모든 전쟁과 혐오가 정당화될 테니 말이다. 본능이 그렇다는데, 그게 인간의 본성이라는데, 이러면서 말이다. 교육과 이성과 합리적인 제도의 힘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절인 것 같다.


  혐오와 차별은 그것 자체로도 악이지만, 내가 비주류가 되었을 때 나를 공격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이름의 공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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