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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Apr 29. 2018

영어를 쓰는 러시아 스파이

영화 <Red Sparrow> (2017)

  그녀는 아름다운 발레리나였다. 어느 날 사고로 볼쇼이 수석 무용수 자리에서 쫓겨난다. 러시아 비밀 정보기관 고위층인 삼촌의 권유(를 가장한 협박으)로, 스패로(스파이)가 된다. 아픈 엄마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녀에게 닥친 삶은 창녀와 요원 사이, 어느 즈음에 위치한 위험하고 치명적인 몸부림이다.

  영화 <레드 스패로>는 러시아의 치명적인 미녀 스파이와 그녀의 타깃이 된 미국 CIA 요원의 석연치 않은 인연을 보여준다. 여기서 내가 더 석연치 않게 여긴 것은, 그녀가 영어를 쓴다는 점이다.

레드스패로가 된 도미니크

  이 영화에 대해 쓴 글들을 몇 개 읽어봤는데, 다들 제니퍼 로렌스의 노출을 불사한 연기와 반전에 감탄하면서도 그녀가 영어를 쓰는 러시아인 역할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을 안 했다. 사실 이건 언급할 사항이 아닌지도 모른다. 문법에 맞지 않아도 예술적 표현을 감안해 용인되는 시적 허용처럼, 영화에서도 어쩔 수 없이 묵인되는 영화적 허용이니 말이다. <레미제라블>이 영어권 배우에 의해 영화화되고, <안나 카레니나>가 영국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에게 타이틀 롤을 맡겼듯이. 빅토르 위고와 톨스토이가 왜 나의 신성한 모국어로 영화를 만들지 않았느냐고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진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씬에서 그녀가 러시아 억양을 가미한 영어를 쓰기에, 부모 중 한쪽은 영어권 출신이라는 배경 설명이 나올 거라는 부질없는 추측을 했다. 뒤이어 러시아인으로 나오는 모든 배우가 영어를 쓰는 걸 보고 나의 순진함과 멍청함에 머쓱해졌다. 이 영화에 들어간 제작비면,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배우를 캐스팅하거나, 제니퍼 로렌스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게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제니퍼도 러시아 태생처럼 구사하긴 한계가 있겠지만. 그들은 아마 돈 때문이 아니라, 자막 읽기 거북해하는 북미 시장의 관객들을 위해 언어쯤은 가볍게 무시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배경인 우리나라 사극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일본어 특유의 억양을 가미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걸 볼 때처럼 낯 간지럽다. 나만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을 위해 자본을 집행하는 할리우드는, 배경이 어디건 언어는 대부분 영어로 통일한다. 영어가 정말 어색한 아시아나 아랍권 배경에서는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비중으로 현지 언어가 나오는데, 그나마 배우들이 모국어처럼 못해서 어설프고 덜 떨어져 보인다. 김정은이 나오는 미국 오락 영화에서 그가 한국어를 심하게 더듬거리고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걸 보고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북한말 억양까진 바랄 수도 없게, 어쩜 그렇게 대충 만든 티가 역력한지 짜증이 났다. 할리우드는 수백 명의 히어로즈와 외계인을 만들어내는 것이, 외국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배우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쉬운 것 같다.

김정은이 등장하는 미국 영화


  외국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전달 체계가 다른 언어가 아니다. 모국어와는 다른 언어의 '낯섦'에서 우리는 다른 문화의 '낯섦'을 경험한다. 행위와 관습을 서술하는 다른 방식, 우리의 경험을 언어화하는 다른 체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어 하나를 더 쓴다는 기능적인 이로움이 아니라, 그 언어로 대표되는 다른 삶의 운율을 내재화하는 것이다. 언어를 바꾸면 내 삶의 속도와 질감이 달라지고, 내 안의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 프랑스에 살지 않아도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순간, 프랑스어권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 체계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미녀 스파이가, 우리에겐 다소 거친 발음으로 들리는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작전을 수행했다면 어땠을까. 어설프게 러시아어 억양을 흉내 낸 영어 대신 말이다. 사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내 입장에서 그녀의 억양이 어떤 느낌인지 미세한 뉘앙스는 감지하기 힘들다. 그저 영미권 사람들의 억양과 다르게 구사하고 있구나 정도만 눈치챌 뿐이다. 북미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일본인 역을 하는 한국 배우의 일본어스러운(?) 한국어에 민망해하는 나 같은 기분일까. 아니면 늘 영어를 구사하는 외국인 배역에 익숙해져 아무렇지 않을까. 만일 그들이 아무렇지 않다면, 영화 하나 보면서 까칠하게 따지는 나도 문제지만 그들도 문제가 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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