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이스 May 02. 2018

이게 정말 니 '삶의 목적'이라고?

영화  <A DOG'S PURPOSE>

'내 삶의 목적'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영화를 봤다. 원제는 A DOG'S PURPOSE. 인간이 아니라 어떤 개의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길거리에 버려진 강아지가 어린 소년을 만난다. 소년은 강아지에게 한눈에 반하고 둘은 친구이자 삶의 동반자가 되어 함께 성장한다. 개는 소년의 첫사랑 소녀와도 어울리고, 위험에 빠진 주인을 구해주는 등 가족들과 끈끈한 정을 나누다 숨을 거둔다. 환생한 개는 이번엔 암컷으로 경찰견이 된다. 좋은 주인을 만나 훈련을 받다가 범죄현장에서 소임을 다하고 숨진다.

어린 소년과 강아지의 첫 만남

다시 태어난 개는 젊은 여자의 반려견이 된다. 외로운 주인과 교감하며 그녀의 사랑을 도와준다. 주인의 아이들이 태어나자 그들의 친구이자 형제로 함께 하다 수명을 다한다.

또다시 태어난 개는 이번엔 좀 불우한 환경에서 살아간다. 빈민촌 여자에게 입양됐지만 버림받는다. 추레한 몰골로 거리를 헤매다 기적적으로 첫 번째 주인과 재회한다. 이제는 노인이 된, 자신에게 첫 번째 이름을 지어준 그 어린 소년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개의 수명이 인간보다 훨씬 짧으니 몇 번의 환생을 하고도 옛 주인을 만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노인은 당연히 그 개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거두어준다. 개는 예전에 헤어진 노인의 첫사랑을 찾아 외로운 주인에게 기쁨까지 선물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옛 주인에게 확실하게 보여준다. 마치 그게 궁극적 삶의 목적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몇 번을 환생해서 다시 만난 첫번째 주인과 개


영화의 주인공인 개는 전생을 기억하는 특이한 존재다. 몇 번의 생을 거듭하며 주인들에게 개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을 준다. 시련과 고통이 없진 않았지만 이상적인 반려견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마지막엔 궁극적인 삶의 목적까지 달성한다. 그런데 이 삶의 목적이라는 게 정말 개가 원하는 목적인지는 의문이다.


이 영화는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개 이야기다. 철저히 인간 입장에서 반려견의 삶을 그린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반려견이 이랬으면 좋겠다, 이 정도는 돼야 한다는 것 같다. 정말 인간보다 짧게 사는 개가 여러 생을 거듭하는 동안 옛 주인을 찾고 싶을까. 그게 생을 거슬러 올라가 달성해야 할 삶의 목적일까.


인간보다 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우정을 주인과 나눈 개는 수없이 많다. 사람들은 반려견에게 많은 사랑과 위로를 받고 가족이 되어 함께 한다. 그런데 그건 인간의 입장이고 인간이 느끼는 효용 가치이지, 정작 개가 어떻게 느끼는지는 모른다. 생명이 있는 동물이니 같이 사는 사람과 교감하고 본능적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위해 전 생을 바치고, 주인을 위험에서 구하고, 외로운 마음을 달래줘야 한다는 건, 개에게 투정하는 인간의 어리광 같다. 그게 개의 삶의 목적이라고 단정 짓는 건 오만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유치한 생각 아닐까. 개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인간과 더불어 잘 사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있지만, 그게 꼭 인간이 바라는 걸 해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개가 사람을 반기며 꼬리를 흔들고, 먹이를 주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건 본능에 충실한 것이고, 사랑받는 만큼 리액션하는 것이니까.


이상적인 반려견의 삶을 마치 개의 사명처럼 그렸다는 게 좀 거슬리긴 해도, 이 영화는 무척 재밌다. 개를 안 키우는 나도 끝에 눈물을 흘릴 만큼 감동적이다. 그래도 제목은 영 마음에 안 든다. 아니, 개에게 미안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어를 쓰는 러시아 스파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