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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n 17. 2018

축복받은 도피

책 <혼자 책 읽는 시간>  Nina Sankovitch


  가족의 죽음으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슬픔에 젖은 여자가 책을 들었다. 그녀는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읽으며 언니를 잃은 슬픔을 애도한다. 술이나 음식에 탐닉하거나, 훌쩍 떠나거나,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서 무기력하게 자신을 방치하는 대신, 수많은 작가들에게 귀 기울이고, 유려한 문장에서 삶의 의미를 발굴한다. 어떻게 보면 팔자 좋은 사람의 사적인 끄적임 같은 이 독서일기는 책을 통해 삶으로 도피하고 문학으로 영혼을 치유하는 꽤 건전하고 이상적인 애도사다.


  누구나 이 저자처럼 우아하고 팔자 좋게(?) 독서라는 고차원적인 애도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당장 집안일에 매여있거나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사람은, 이런 고상하고 취향에 맞는 애도 시간을 가질 여력이 없다. 그래서 조금은 선입견을 갖고 이 책을 펼쳤다. 그리고 솔직히, 책을 덮은 지금도 그 선입견이 깨지진 않았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 언니를 생각하는 건, 실제 언니가 있는 나로서는 그리 어렵지 않은 비극적 상상이다. 당장 내 자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책의 저자보다 더 애통해하고 슬퍼할 거라 확신한다. 솔직히 상상하기도 싫다. 그래서 그녀가 지극한 슬픔을 독서로 치유했다는 게 일면 이해가 안 됐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독서가 아니라 더한 짓을 해도 슬픔은 슬픔이고 비극은 비극일 뿐이다. 그냥 (세월이 가면서 옅어지길 바라면서) 슬픔을 안고 사는 것이지, 그게 극복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니가 세상을 떠난 직후도 아니고 3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새삼 애도를 위한 1년의 시간을 스스로에게 준다는 것이 뭔가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울적하고 무기력한 기분에 만사 제쳐놓고 좋아하는 책 읽기로 도피하는 것을, 그런 식으로 명분을 만드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직 엄마의 손이 필요한 어린 아들이 넷이나 있는 주부가, 책 읽을 핑계를 저렇게 멋지고 누구도 거역할 수 없게 만들어내는 게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그녀가 이 특별한 1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노력과 인내뿐 아니라 주위의 협조도 한몫했다. 한때 변호사였던 그녀는 역시 변호사인 남편과 네 아들에게, 1년 동안 독서를 위해 가사 노동과 사회 활동을 최소화 하겠다고 선언한다. (다행히) 협조적인 남편 덕에 합리적으로 가사를 분담하고, 자신의 지적 성향과 욕구를 최대한 끄집어내 독서를 위한 최적화된 환경을 만든다. 그리고 1년 동안 매일 한 권의 책을 읽고 리뷰를 쓴다.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공개적인 블로그에 리뷰를 올리며  '애도를 위한 독서의 원칙'을 지키는데, 그 인내와 노력은 실로 대단하다. 그녀가 책에서 언니의 죽음에 대한 의미와, 그 이후에도 살아있는 자신에 대해 '왜'라는 의문을 던지고 애써 답을 구할 때는 살짝 부담스럽기도 했다. 애도를 위한 특별한 독서이니 만큼, 삶과 죽음에 대해 통찰할 수 있는 책 읽기는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녀의 과잉된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이런 지극한 슬픔과 애도의 명분이 없더라도, 평소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다. 독서를 통한 깨달음과 사유는, 그녀의 평생에 걸쳐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고 언니의 죽음은 그냥 계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독서는 아무 목적도 의미도 없는 순수한 오락에 가깝다. 그 어떤 명분도 핑계도 없이 자발적으로 시간을 즐겁게 체념시키는 사적인 행위다. 멍 때리고 있어도, TV를 봐도, 술을 마셔도 어차피 시간은 흘러간다. 책을 읽으면서 보내는 시간은 돈 한 푼 안 생기는(오히려 책값을 비롯한 돈이 든다) 비생산적인 행위지만, 그나마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취미다. 그야말로 내 생의 시간을 자발적으로 즐겁게 소비하고 체념시키는 행위다. 나도 지독한 슬픔 앞에서 이 책의 저자처럼 독서로 애도할 기회를 갖게 될지 모르겠지만, 평소에 틈틈이 책으로 도피하고 체념하기에 그런 거창한 명분은 필요 없을 듯싶다. 책에게 바라는 것이 없으니 무용한 독서 행위에 화날 일도 없다. 생각보다 재밌게 읽은 책은 순수한 기쁨이고, 어려운 전문 서적을 읽으면 작은 뿌듯함이 생긴다. 이도 저도 아닌 책은 중간에 포기해도 조금도 찝찝하지 않다. 나는 아무런 목적도 없고 강요도 없는 이 무가치한 독서 행위가 그 어떤 것으로도 변질되지 않길 바란다. 이 비생산적이고 자발적인 감정 노동만큼은 내 삶에 순수한 기쁨으로 남아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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