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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n 23. 2018

드디어 코끼리를 쏘다!

에세이 <Shooting an Elephant> G. Orwell.

  나답지 않게 벼르고 벼른 조지 오웰의 이 에세이를 드디어 읽었다. 그의 에세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지만, 난 이제야 읽었다. 아주 사소하게 시작된 호기심이 아니었으면 아마 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왜 이걸 읽을 수밖에 없는지는 그의 소설 『버마 시절』을 읽고 쓴 글에서 이미 밝혔다. 이 에세이는 『나는 왜 쓰는가 Why I Write』에 수록된 스물아홉 편 에세이 중 하나다. 이 책에 수록된 「교수형」이란 에세이와 더불어 오웰이 버마 시절 제국의 경찰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이 코끼리 얘기는 그의 사후에 출간된 에세이집의 제목으로 선정되었을 만큼 유명한 작품이다.


  1936년은 조지 오웰에게 중요한 해였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건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주의 사회를 '지지하는' 것들이다"라고 할 만큼 그의 작가 인생에서 중요한 해였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 활동에 전기가 될만한 중요한 해를 갖는다는 건 여러 모로 의의가 있고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직접 말할 정도로, 1936년 이후 그가 쏟아낸 글은 이전과 확실히 다르며, 그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로 올려놓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에세이도 1936년에 나온 것이다.



  오웰이 남부 버마 몰멩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했을 때는 버마인들의 반유럽 정서가 만연했다고 한다. 경찰인 그는 사악한 제국주의를 혐오하고 심정적으론 버마인들 편이었지만, 그걸 버마인들에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저 빨리 이 일을 그만두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코끼리 한 마리가 시장을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간다. 야생 코끼리는 아니고 발정기를 맞은 길든 코끼리였다. 묶여있던 사슬을 끊고 탈출한 코끼리는 이미 오두막을 부수고 소 한 마리를 죽인 후 헐벗은 노동자 한 명을 죽였다. 진창에 처박혀 죽은 사람을 보자 온 동네 버마인들이 다 나와 오웰이 코끼리를 처단하길 바라는 눈초리로 쳐다본다. 그는 총과 탄약통을 가졌지만 사실 코끼리를 죽일 생각까진 없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노동자보다 코끼리 한 마리가 그곳에서는 더 값어치 있고, 그 코끼리를 처단하는 게 코끼리 주인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기에 함부로 죽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코끼리를 발견했을 땐 이미 발정기가 끝나 평화로워 보여서 굳이 죽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코끼리를 죽일 것이라는 기대에 찬 2000여 명의 버마인들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순간, 오웰은 백인의 동양 지배가 공허하고 부질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하게 된다. 총을 든 백인이 폭력을 휘두르는 폭군이 되는 건 본인의 의지지만, 일단 백인 나리라는 감투를 쓰면 원주민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언제나 '원주민'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원주민'의 기대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게 백인 나리들의 조건이라는 것을 그는 몸소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잔뜩 기대하고 있는 버마인들 앞에서 코끼리를 향해 총을 쏜다. 거대한 그 동물은 몇 번의 총탄을 맞고도 쉽게 죽지 않는다. 오웰은 가진 총탄을 다 쓴 후에 자리를 떠났고, 나중에 코끼리가 30분을 더 버티다 죽었다는 얘길 듣는다. 그는 코끼리를 쏜 게 순전히 (버마인들 앞에서) 바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한 짓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사람 있을까 종종 생각하곤 했다.


  코끼리를 쏜 것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밀리듯 제국의 경찰, 즉 백인의 본분을 다 하기 위해 한 내키지 않은 행동이었다. 진심이나 가치관과 관계없이 그의 피부색과 국적과 신분이 그를 제국주의에 복무하게 했고, 오웰은 그 괴로움과 참담함을 글로 남겼다. 이렇게만 보면 오웰은 양심적인 반제국주의자로 보인다. 본인이 괴로워하고 경찰을 그만뒀으니 사실일 것이다. 그가 영국의 양심적인 지식인인 것은 맞지만, 그의 글을 보고 영국의 식민 정책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 사람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자신이 영국인 경찰이 겨눈 총구 앞에 선 코끼리 입장이 안 되어 봐서 그런가 싶을 정도로 우매하게 보인다. 오웰은 괴로워하면서도 어쨌든 코끼를 쏴 죽였다. 버마인들을 실망시킬 수 없다는 '백인 나리'의 입장에서 행동한 것이다. 괴로운 마음을 토로한 것은 양심적인 고해성사일 뿐이다. 그가 버마인들 앞에서 심정적으로 무기력해져 코끼를 쏘며 괴로워한 것이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우호적으로 볼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이게 내가 이 에세이를 읽고 갖게 된 생각이다.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이런 계기로나마 조지 오웰의 에세이와 소설을 읽어볼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다. 내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을지 솔직히 상상하기 쉽지 않다. 나라면 과연 코끼리를 쏠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코끼리를 쏘느냐 안 쏘느냐가 아니라 코끼리와 버마인들 사이에 낀 입장이 되어서 한 생각과 행동이 한 사람의 일생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상황을 글로 남긴 것은, 그 순간 양심의 가책을 느낀 후 잊어버린 것보다는 훨씬 위대하고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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