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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01. 2018

오, 대니 보이

책 <대니> (2013) 윤이형 단편소설


  대니.. 그는 스물네 살의 빛나는 청년이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지닌 완벽한 신체와 짜증을 모르는 다정함이 몸에 밴, 네 살짜리 여자아이 지희의 매니(남자 보모)다. 예순아홉의 할머니가 처음 대니에게 들은 말은 '아름다워'다. 같이 있던 14개월 된 손자가 아닌,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을 땐 당황하기까지 한다. 슬그머니 이 눈부신 젊은이를 경계한다. 그러나 그를 알게 되고, 이해하자, 곧 사랑하게 된다.

  맞벌이하는 딸이 100만 원 조금 안 되는 돈을 주면, 할머니는 그 돈으로 아이를 먹이고 입히며 키운다. 무릎이 아프고 허리가 뻐근하지만 자리보전하고 누울 정도가 아니니, 무작정 의지하는 딸을 위해 애를 봐줄 수밖에 없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강해야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할머니는 '강하고 인자하고 명랑하기'까지 해야 하는 시대에, 할머니의 삶은 너무 고단하다. 주말에 딸이 아이를 데려가면 홀로 소주를 삼키며 '나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읊조린다.


  소중하고 예쁘지만 순하지 않은 손자는 자주 투정을 부린다. 11킬로그램짜리 아이와 5.7킬로그램의 유모차, 기저귀 한 팩과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할머니는 짐을 들어주겠다는 대니의 친절을 거절할 기력이 없다. 울며 떼쓰는 손자를 신통하게 달래는 그는 할머니에겐 신비로운 마법사나 다름없다.


  대니는 미국에서 제조된 안드로이드 아이 돌봄 로봇이다. 말 못 하는 아이를 보기만 해도 원하는 걸 캐치하는 고감도 수용능력을 장착한 이 인공지능에게 아이를 달래고 돌보는 건 본연의 임무일 뿐이다. 그가 할머니 주위를 맴도는 건, 같은 일을 하면서 조금도 힘들지 않은 자신과 달리 할머니는 '견디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견딤을 알아주는 유일한 존재, 대니의 정체는 할머니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루 종일 울거나 괴성을 질러대는 아이만 상대하다 따뜻한 웃음과 다정한 말을 건네는 대니는 할머니의 삶에 따뜻한 피톨처럼 생기를 불어넣는다. 대니가 손자를 봐주는 잠깐의 시간은 아찔하게 달콤하고 두렵다. 악다구니와 발버둥에서 벗어나 밥을 천천히 씹을 수 있고, 두통약을 삼키지 않아도 되는 이완의 시간이다. 대니에게 장착된 다정함과 배려는 신체적 휴식뿐 아니라 정신적 여유와 삶의 기쁨이 되어 메마르고 고된 할머니의 일상을 촉촉하게 해준다.


  그것이 문제가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할머니가 대니와 함께 보내는 동안, 점점 짙어가는 친분의 밀도는 대니를 제조한 곳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공지능이라 인간의 감정을 수용하고 자가발전시키는 능력이 있지만, 아이와 사용자(아이의 부모)가 아닌 타인과 주고받는 감정은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낳는다. 대니가 인간들(주로 노인들)에게 돈을 요구한 정황이 드러나자 제조사는 조사에 들어간다. 돈이 필요 없는 인공지능 대니는 돈을 원했다. 오로지 할머니를 위해, 그녀를 편안하게 해드리고 아이들과 할머니와 같이 살기 위해서.

'금품 갈취'는 돌보미형으로 특화된 이 AI에게 절대 생성될 수 없는 불가능한 패턴이다. 단, 모르는 사람에게 협박하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친구라고 여긴 사람에게 돈을 빌리는 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이 일로 대니는 소멸을 앞두고 있다. 아니, 할머니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는 이미 소멸한 것과 다름없다. 표정이 모두 뽑혀나간 얼굴로 앉아있는 대니는 더 이상 할머니의 친구가 아니다. 할머니는 자신이 대니를 사랑했고 죽였다고 여긴다. 그녀는 홀로그램 같은 기억을 반추하며 여전히 살아서, 대니와 함께 한 시작과 끝을 간직하며 그것을 견딘다.




  인간이 인공지능을 대하는 태도는, 인간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가장 절박하고 원초적인 것을 시키면서도,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매몰차게 폐기할 여지를 남겨둔다.


  손자를 키우는 70이 가까운 노인은 자식들에게도 이미 산송장 취급을 받는다. 여행은 의례 지들끼리 가고,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돈만 주면서 핏줄이니 도움받는 걸 당연히 여긴다. 노인이 거절하지 못할   걸 아는 이 야비한 행태와 사회적으로 고립된 외로움, 신체적 한계는 노인을 진짜 산송장으로 만든다. 살아 숨 쉬는 인간들이 소외시킨 노인을, AI는 유일하게 여자로 그리고 인간으로 대한다. 이 또한 인간이 그에게 요구한 주요 기능이다. 인간의 감정을 수용해 자가발전시키고 지치지 않는 능력으로 인간의 부족함을 메우는 것. 문제는 인공지능과 감정을 주고받고 교류한 인간이 또다시 소외되는 일은 시작보다 더 가차 없고 매몰차다는 것이다. 로봇인걸 알고도 정을 주고 대화하는 건, 그가 나를 알아주고 이해해주기 때문이다. 존재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작용을 이유로 갑작스레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면, 그동안 로봇과 주고받은 기억과 감정은 무엇이 되는 걸까. 어제까지 나를 보고 웃던 얼굴이 공허한 눈빛으로 쳐다볼 때,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 만든 로봇에 의해 더 큰 상실감과 허무를 경험하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 좀 끔찍한 건, 이 관계가 인공지능 자의가 아닌 사용자(로봇 '대니'의 주인인 지희 엄마)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넨 데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사실, 이건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시작이 어땠건, 대니는 할머니와 대화하며 감정을 키워갔고 둘이 함께 한 시간은 본질적으로 진실이다. 그게 할머니에게만 존재하는 진실이라는 게 문제다. 상대가 인지하지 못하는 진실과 기억, 아니 상대라는 존재 자체가 변형되어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현실을 노인은 무슨 수로 감당할 수 있을까. 할머니의 뼛속과 영혼에 생생하게 새겨진 감정이 대니에게는 버튼 하나로 삭제되는 것이라면, 할머니의 상실과 허무는 또 어떤 인공지능을 이용해 치유해야 하는 걸까. (인간은 이미 '상실과 치유'의 기능적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끝없는 뫼비우스 띠를 보는 것처럼 막막하다.


  인공지능이 선사할 머지않은 미래가 달콤한 면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찔한 이 달콤함을 인간이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이야기에서, 할머니가 대니에게 받은 위로와 사랑은 생이 주는 그 어떤 선물보다 강렬한 달콤함이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강제로 빼앗기는 심정은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는 아찔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내 손으로 대니를 죽였다고 체념하고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할머니 나이가 되었을 때 실현될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두렵다. 어쩌면 더 빠른 미래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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