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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11. 2018

양육을 실험한 부모

영화 <기니피그 패밀리 Birthmarked> (2018)

  인간의 재능은 타고나는가 만들어지는가. 타고난 본성을 이기는 양육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 시대를 초월한 질문에 정면으로 도전한 과학자 부부가 있다.


  벤과 캐서린은 인류 발전에 기여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아이를 비롯해 입양한 아이 두 명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다. 실험 전제로, 인간은 타고난 기질이 아닌 환경에 의해 재능을 인위적으로 개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부모가 긍정적으로 개발 지향적 양육을 하면, 과학자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이를 아티스트로, 폭력 성향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를 평화주의자로, 우둔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를 수재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부부는 갓난아이 때부터 지속적인 훈련과 교육을 통해 후천적으로 재능을 이식하는 게 가능하다는 결론을 도출해내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윤리적 문제는 아이를 사랑으로 양육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얼핏 봐도 참 발칙하고 대담한 프로젝트다. 그리고 예상대로 웃지 못할 변수와 돌발 상황이 터진다.


  부부는 과학 재단을 소유한 거츠의 후원을 받아 실험을 진행한다. 외부 환경을 차단한 채 숲 속 집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며, 재단에서 고용한 조수와 함께 홈스쿨링으로 교육한다. 아이들은 각자 아티트스, 평화주의자, 수재가 되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한 교육을 받는데, 열세 살이 되자 사춘기 반항과 호기심이 드러나며 부작용이 속출한다. 6개월마다 한 번씩 실험 상황을 체크하는 거츠는 진척 없는 부진한 성과에, 만약 실험이 실패하면 그동안 후원했던 돈을 토해내야 한다고 으름짱을 놓는다. 초조해진 부부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의도대로 자라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에 실망한다. 아빠 벤은 물어내야 할 막대한 돈을 걱정하며 아이들을 몰아세운다. 거츠의 압박에 정신줄을 놓은 엄마 캐서린은 애들에게 더 이상 실험을 숨길 수 없다며 사실을 밝히자고 한다. 부부가 싸우는 동안 아이들은 차사고를 내고, 사회복지국은 그들을 기숙학교로 보낸다.


  거츠는 실험에 실패하고 아이들마저 뺏겨 좌절한 부부에게 충격적인 진실을 밝힌다. 이들이 아이들을 실험할 때, 자신은 부부를 실험했다고 고백한다. '대의란 이름으로 자행된 비윤리 행위의 합리화'라는 명목의 이 실험은, 인간의 진보를 위해 아이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은 부부를 관찰하고 실험한 거츠의 빅픽처였던 것이다.  


과학자 부부의 실험 대상이 된 아이들


  거츠는 실험 결과를 책으로 내고, 이를 본 아이들은 자신들이 부모가 하는 실험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에 휩싸인다. 실험은 했지만 아이들을 사랑으로 양육했던 캐서린과 벤의 삶은 분열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부모의 기니피그였다고 자학하고, 부부는 아이들에게 진심을 전하려 안간힘을 쓴다.


  엉뚱하고 발칙한 이 블랙코미디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과학의 순진하고 어리석은 믿음에 돌을 던지며, '지켜야 할 존엄성과 진보 사이의 경계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한다. 이 영화 배경이 1970~80년대라 해도, 인권에 대한 윤리적 문제가 발생하는 실험의 발상과 과정은 납득하기 힘들다. 자기들이 실험 대상인 줄 모르고 살았던 아이들이나, 누군가의 심리 실험 대상인 줄 모르고 살았던 부모나 세상에 기만당한 모르모트이긴 매한가지다. 이 모든 게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기막힌 사기이자 인권침해다.


  이 영화에서 안타까우면서도 섬뜩한 부분은, (자신들의 친자식을 포함해)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계획한 부부의 논리다. 이들이 과학적 의도대로 아이들을 양육하는 게 윤리적으로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유는 딱 하나다. 사랑으로 키울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바라는 바를 주입하며 등 떠밀지만 결국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다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걸 감싸주고 용서할 수 있는 만능키다. 세상을 원리에 입각해 증명하는 게 소명인 과학자들 입에서 나온 '사랑'의 전능함을 믿는다는 말이 아이러니하면서도 그럴싸하게 들린다. 부부는 아이들을 진정 사랑했다. 비록 목적이 있고 방법이 불순하다 해도 사랑 자체를 부정할 순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알았을 때 더 경악하고 배신감이 들었을 것이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양육된 기니피그였다는 사실에.   


  실험이든 사랑이든, 부모는 최선을 다해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한다. 실험 보고서만 작성하지 않을 뿐, 모든 부모는 자식에게 기대와 선망을 투사하며 (부모가 원하는) 최상의 삶을 살게끔 등 떠민다. 부모의 투자와 그에 따른 기대는, 최상의 결과를 바라는 평생에 걸친 장대한 실험이다. 자녀 또한 은연중에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고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기꺼이 적성에 안 맞는 실험실 안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실험은 말 그대로 실험이다. 실패할 수도, 전제를 입증할 결과를 도출해 내지 못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아닌 부모가 주관한 실험에 실패한 것이, 인생에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몸소 증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니피그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이 영화의 발칙한 실험처럼, 누구나 뭐든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할 필요는 없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행복하다는 걸 증명하면 된다. 아니, 삶은 굳이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주체인 삶을 대체 누구에게, 어째서 증명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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