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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09. 2018

외로우면 뭔 짓을 못할까마는

영화 <Oh, Lucy!> (2017)


  삶이 계획대로 흘러간 적이 있나?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시시각각 닥치는 미지의 시간을 불안해하고 걱정하지만, 일말의 기대로 궁금해하기도 한다. 특히 외로운 사람은 오늘은 뭐 특별한 일 없나, 좀 놀라도 좋으니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의 일이 일어나길 바란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루시'가 된 세츠코


  40대 싱글 직장인 세츠코에게 그날은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진 기적 같은 하루다. 출근길 전철역 플랫폼, 세츠코 바로 뒤에 선 남자는 들어오는 열차를 보더니 그녀에게 신체적 테러를 가하고 열차로 뛰어들어 자살한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말문이 턱 막히지만, 그녀는 이 충격을 냉소적으로 넘겨 버린다. 시큰둥하고 사교적이지 못한 중년 여자의 삶엔 기쁨도 열정도 없다. 그녀가 조카 미카 대신 간 영어학원에서 미국인 강사 존(조시 하트넷)을 만나기 전까진.


  영어 학원답지 않은 가라오케 분위기의 요상한 룸에서 '허그'로 시작한 수업은 '루시(LUCY)'라는 이질적인 이름을 부여받고 금발 가발까지 얻어 쓰자 어색함의 절정에 달한다. '하이, 마이 네임 이즈 루시' 수준의 회화를 하는 동안 시큰둥한 그녀가 언제 뿌리치고 나올까 했는데, 존이 입에 넣어준 탁구공을 물고 발음 연습까지 하는 열의를 보인다. 그렇다, 그녀는 존에게 반했다! 아니, 존으로 상징되는 자기 인생에 기대할 수 없었던 기적적인 '낯섦'과 '상상 그 이상의 것'에 각성한 것이다.


영어강사 존과 루시


  그녀는 외롭고 심술궂고 냉소적이다. 동료의 은퇴식을 싸하게 만들고, 직장 생활도 마지못해 한다. 좁고 허름한 집은 돼지우리 같다. 어릴 적 애인을 언니에게 빼앗겼다는 피해의식에 찌들어 살며, 달콤한 과자를 먹는 대신 독가스 같은 담배만 피워댄다. 세츠코는 생의 기쁨과 환희에 담쌓고, 회색 필터를 통해 세상을 보는 여자다. 루시는 다르다. 존의 허그에 적극적으로 응하고, 오렌지색 탁구공을 회색 빛 일상에 떠오른 태양 보듯 한다.


  이 반짝이는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다. 존이 조카 미카와 미국으로 떠나자, 세츠코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미국으로 간다. 평생 원수인 언니 아야코까지 딸을 찾겠다며 동행한다.


세츠코가 반한 남자 존


  세츠코의 미국 여행은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다. 존을 만나고, 이미 그를 떠난 미카를 찾는 여정을 함께 하며 그와 얼떨결에 카섹스까지 한다. 언니와 싸우고, 타투를 하고, 우연히 만난 미카와 다투다 그녀를 다치게 한다. 단조롭고 건조한 세츠코의 일상에 이렇게 다이내믹한 모험과 일탈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녀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사실 그녀의 미국 여정은 다분히 충동적이고, 안쓰러울 정도로 절망적이다. 일시적인 열의에 몸을 던진 중년 여자의 주책은 솔직히 아름답지 않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발광같다. 그녀의 처지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공감하는 부분도 있지만, 때때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고독해서 저러겠지, 외로우면 뭔 짓을 못할까 싶다가도, 루시가 되지 못한 세츠코의 뚱한 얼굴을 보면 우울한 연민이 솟아난다.  


미국에서 만난 세츠코와 조카 미카


  일본으로 돌아온 세츠코의 현실은 더 울적하다. 좌천되자 회사를 그만두고 수면제를 과다 복용한다. 마침 집에 찾아온 (영어학원에서 알게 된) 다케시 때문에 위기는 넘겼지만, 그녀의 처절한 몸부림은 끝나지 않는다. 세츠코는 루시가 될 수 없고, 루시 또한 세츠코가 되지 못한다. 누가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외로움은 왜 꼭 병이어야 하는가, 외로움이 친구가 될 수는 없는 건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달라붙어 지겹게 함께 해야하는 고질병 취급을 하니, 외로움의 숙주인 인간은 미치지 않았는데도 미치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가수 이효리가 한 말이 생각난다. '그냥 사는 거지 뭐. 행복하려고 하니까 힘든 거야.' 세츠코든 루시든, 그 여자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그냥 사는 거지 뭐. 외롭지 않으려 하니까 힘든 거야. 외로운 게 뭐 어때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게 뭐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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