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이스 Jul 17. 2018

생물학이 저지른 위대한 장난

책 <죽어가는 짐승 The Dying Animal> Philip Roth

  이제 간간이 '필립 로스'의 문장을 섭취하지 않으면 금단까진 아니더라 허전하고 맥이 빠진다. 고작 세 권 읽고 하는 말이 과하다 할지 모르겠지만, 이 충족되지 않은 허기는 꽤 구체적이고 애틋하다. 그는 고인이 됐고, 그의 전 작품이 번역되어 나온 것도 아니니, 조만간 끝날 이 일시적인 충족은 영원한 갈망이 될 것이다. 그날을 유예하고 싶어 천천히 읽어도 달라지는 건 없다. 냉정한 나는 재빨리 다른 문장을 찾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내가 가질 수 없는 걸 떠올리며 씁쓸해하거나 어쩌면 다행이라고 체념할 것이다.    




  『죽어가는 짐승 The Dying Animal』은 62세의 대학교수이자 TV에 나오는 저명한 비평가 데이비드 케페시가 주인공이다. 필립 로스의 다른 작품 『유방』과 『욕망의 교수』에는 더 젊은 그가 등장한다. 주인공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작가가 평생에 걸쳐 행한 생의 마법이다. 나는 예순둘의 데이비드를 처음 봤는데, 나중에 젊은 그를 만나면 미래에서 온 예언자의 시선으로 볼 것이다. 이미 내밀히 알고 있는 사람의 과거를 들춰보는 재미가 쏠쏠할 거라 기대한다. 사실 내가 기대하는 건 재미가 아니라 충격과 감탄, 경이롭고 절망적인 한숨에 더 가깝지만.


  학구적인 교수 데이비드가 20대 초반의 어린 여자 제자들을 기품과 교양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무기로 내세워) 침대로 끌어들이는 과정은 예술과 철학의 경지로 보일 정도로 정교하고 우아하다. 매년 학기가 끝나면 자기 집에서 파티를 한 후, 끝까지 남는 여학생과 동침하는 일련의 과정은 그의 삶을 풍성하게 하지만 허무와 고립의 낙원으로 만들기도 한다. 데이비드는 '결혼하는 이성애자 남자는 교회에 몸담는 사제와 같이 순결 서약을 한다'라고 생각한다. 결혼 생활을 박차고 나와 자유분방하고 내밀한 에로스를 만끽하는 그에게 포착된 한 여자, 쿠바인 3세 콘수엘라 카스티요는 장장 8년간 그의 삶과 사상을 지배하고 괴롭히는 욕망의 대상이자 여신이다.


  "이제 이건 아이와 끝도 없이 벌이는 전쟁이 되었어. 충족과 소유의 느낌은 어디로 갔을까? 아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가지지 못하는 걸까? 원하는 것을 얻고 있는 순간에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있어. 그 안에는 평화가 없고 있을 수도 없어. 우리 나이와 피할 수 없는 가슴 저미는 느낌 때문에. 우리 나이 때문에, 나는 쾌락을 누리지만 갈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 전에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나? 그전엔 예순두 살이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아이'로 지칭되는 여자는 한 번도 예순두 살이었던 적이 없는 노교수를 그렇게 지배한다.



죽어가는 짐승1- 연인 '콘수엘라 카스티요'


  60대에 접어든 데이비드 케페시는 죽어가고 있다. 생명의 질서는 심각한 병이 없더라도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은 남자를 죽어가게 한다. 그에게는 자신과 더불어 '죽어가는 짐승'을 관찰하는 심미안이 있다. 콘수엘라는 그와 헤어진 후 7년 만에 나타나 유방암에 걸렸다고 말한다. 너무나 사랑했고 숭배했고 희롱했던 여자가 일찍이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 남자를 찾아와 가슴을 절제하는 수술 전에 나체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한다. 70세가 된 그는 여전히 뜨겁고 욕망에 충실하지만, 현재에는 무거운 과거가 매달려있다는 걸 알 만큼 현명하다.   



죽어가는 짐승2- 아들 '케니 케페시'


  데이비드는 아들 케니의 고통의 뿌리엔 언제나 자신이 있다고 여긴다.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결혼 생활의 평범함을 박차고 나온 그에게 아들은 정기적으로 찾아와 고통을 토해낸다.


 "우리의 역사엔 모든 장애의 책임을 아버지 발치에 갖다 바치려는 자식의 본능을 방해할 것이 전혀 없었어. 나는 케니의 카라마조프 아버지이고, 케니는, 사랑의 성자는, 늘 제대로 행동해야 하는 그 인간은 나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부당한 일을 당했거나 존속살해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느껴. 자신이 모든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하나로 합친 존재이기라도 한 것처럼."


  아버지로, 남자로, 인간으로 그가 아들을 보며 겪는 좌절과 안타까움은 소설 전반에 피를 흘리는 짐승이 울부짖는 것처럼 드러난다. 표면적으론 케니가 호소하지만, 흘리는 피는 데이비드의 것이다. 알면서도 치유해 줄 수 없고, 자책하면서도 돌아갈 수 없는 아버지라는 자리는 작가에겐 영원한 화두이자 짐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다른 작품에도 '남자'와 '아버지'의 삶을 병행하기 힘들어하는 중년 남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케니의 신체는 아직 죽음을 생각할 때가 아니지만, 그의 내면은 이미 죽어가고 있다. 고인 물처럼 썩어가는 결혼생활은, 아버지처럼 박차고 나올 용기가 없는 남자에겐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필립 로스


죽어가는 짐승3- 친구 '조지'


  데이비드의 친구 조지는 갑작스럽게 발병한 병으로 죽어가면서 단말마의 욕망을 보여준다. 사지가 온전치 못한 상태로 병실에 누워있으면서도 마지막 인사하는 아내에게 입 맞추며 윗도리 단추를 풀려 몸부림친다. 그가 아내 아닌 다른 여자를 생각하며 그랬다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죽어가면서도 발악하는 욕망은 혐오스럽다기보다 잔인하다.


  "생물학이 사람들에게 저지른 위대한 장난은 다른 사람에 관해 뭔가 알기 전에 친밀해지기부터 한다는 거야. 첫 순간에 모든 걸 이해하는 거지. 처음에는 서로의 거죽에 이끌리지만 동시에 직관적으로 전체를 다 파악해. 서로 끌리는 건 등가일 필요가 없어. 이 아이는 이것에 끌리고 상대는 다른 것에 끌려도 돼. 거죽이고, 호기심이지만, 그러다가, 쾅, 전체가 되는 거야."




  생의 비밀을 발설하는 것처럼 솔직하고 은밀하게 들려주는 문장은, 잠자리처럼 홑눈과 곁눈을 가진 작가가 세상을 수만 개의 입체적 조각으로 본 후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낸 솜씨 같다. 인간이 가지지 못한 수만 개의 홑눈이 각각 들여다보는 세상은 어떤 것인지, 너무 궁금하지만 나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남겨놓은 한정된 문장들 속에서만 찾아 헤맬 뿐. 몇몇에게만 허락된 다른 눈이야 말로 생물학이 저지른 위대한 장난 같다. 아니면 신의 선물이던가.    



매거진의 이전글 ‘박완서’라는 이름값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