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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20. 2018

이런 연인 하나쯤 있는 세상

책 <뤽스 극장의 연인> 자닌 테송, 비룡소, (2003)


  한물 간 영화관 '뤽스 극장'에선 수요일 저녁마다 위대한 고전 영화를 상영한다. 마티외는 늘 같은 자리, 세 번째 줄 일곱 번째 좌석에 앉는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마린도 늘 같은 자리에 앉는 단골손님이다. 마티외가 마린에게 좋은 향기가 난다고 하자, 그녀는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향수라고 말한다. 상영 중인 영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가 멈춘 동안 짧은 대화를 나눈 둘은 긴 여운을 갖고 헤어진다. 다음 주 수요일을 기약하며.


  수요일마다 만나는 두 사람은 서로를 조심스럽게 탐색한다. 둘 다 똑같이 개를 키우고, 수요일마다 뤽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게 취미다. 마티외는 재즈 피아니스트고, 마린은 선생님이 되고 싶은 대학생이다. 마티외가 예전에 본 영화를 얘기하면 마린은 가만히 들으며 미소 짓는다. 마티외는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하면서 긴장한다. 마린은 그를 생각할 때마다 설레지만 걱정이 앞선다.  


  목요일, 마린은 개를 데리고 마티외가 말한 '콜드 블루스' 음반을 사러 가게에 갔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뛰어나온다. 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마티외는 음반 가게에서 친구와 얘기하다 문득 말을 멈춘다. 그녀의 향기가 났기 때문이다.


  2주 만에 두 사람은 극장에서 다시 만난다. 마티외는 그녀를 보자 마음이 환해진다. 길에서 마주칠까 봐 주말 내내 집안에만 있었던 일은 금세 잊어버린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 마린의 무거웠던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그를 아주 많이 그리워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들은 이제 영화에 집중할 수 없다. 아니, 영화 장면과 대사에 자신의 마음을 빗대어 보며 한층 몰입한다. 남모를 한숨과 슬픔이 두 사람 가슴에 쌓인다.  


  마티외는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그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고백하기로 결심하고 마린을 집으로 초대한다. 마린은 할머니와 함께 그의 집 앞에 도착한다. 자신이 감춘 사실을 밝힐 생각에 몹시 떨리지만, 걱정하는 할머니를 뒤로 하고 용기 내어 들어간다.


  "마린, 네가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있어. 내가 맹인 안내견이나 안내해 주는 사람 없이 혼자 갈 수 있는 데라고는 뤽스 극장하고 우리 집 바로 옆에 있는 가게 몇 군데뿐이라는 사실이야."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어쩜 이럴 수가 있지! 나도 궁금했어. 네가 언제쯤 내 안경 낀 모습을 보고 놀랄지, 언제쯤 이 상처에 관해 물어볼지."




  앞을 보지 못하는 두 사람이 영화관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다. '뤽스'는 라틴어로 '빛'을 뜻한다. 세상의 빛은 볼 수 없지만,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빛 속에서 빛을 찾은 행운아다. 그들이 수요일마다 보는 고전 영화는 시각장애인이 되기 전에 봤던 영화일 가능성이 높다. 서로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모른 채 만난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서 밀고 당기고, 경계하며 한숨 쉬는 모습은 보통 연인들과 다를 게 없다. 어두운 극장에서의 한정된 만남에 갈증을 느끼고 세상으로 나갈 결심을 하는 건, 상처와 슬픔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의 힘이다.


  비교적 짧은 이야기 속에 담긴 비밀과 반전은 정교하고, 사랑스러운 연인은 안타까우면서도 매력적이다. 지독한 세상이 이런 사랑 얘기 하나쯤 품고 있다는 게 새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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