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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11. 2018

‘박완서’라는 이름값

책 <호미> 박완서 산문집 (2007)


  3년 전쯤, 대대적으로 책 정리를 했었다. 몇 권인지 모를 내 책들 중 절반을 팔았다.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넘겨야 하는 미련과 손때 묻은 기억 때문에 이별이 쉽지 않았다. 처음이 힘들지 일주일에 한두 번씩 중고서점을 들락거리자 의외로 쏠쏠하게 재밌었다. 1년 넘게 정기적으로 그 짓을 했으니 못해도 800~1000권 정도 팔지 않았나 싶다. 돈을 포기하고 미련을 애써 외면하니, 내 수중의 가장 무겁고 부담스러운 것들을 비워낸 공간은 휑하면서도 시원했다. 물리적 공간보다 마음의 공간이 여유로워졌다. 너무 좋아서, 감명 깊게 읽어서, 아깝고 아쉬워서, 꼭 한 번은 다시 읽을 가치가 있어서, 간직한 책들은 다시 들춰보기 쉽지 않았다. 더러 두 번 읽은 것도 있지만, 좋은 느낌보다 다시 읽어서 처음 읽은 감동이 반감된 책도 꽤 된다.


  2년 전 독립하면서 책을 그대로 두고 나왔다. 간간이 옮겨오긴 했지만 대부분 예전에 내가 쓰던 책장에 남아있다. 더는 미룰 수 없어서 책을 옮겨오는 것과 동시에 팔려고 한다. 지금 사는 집엔 변변한 책장이 없다. 그게 책을 간직할 수 없다는 핑계가 되진 않지만, 웬만한 건 도서관에서 빌려보니 굳이 집에 책을 쌓아둘 이유가 없다. 한 달에 서너 권 신간을 구입하는데, 그렇게 야금야금 늘어나는 책으로도 내 작은 집은 금세 비좁아질 것이다. 중고서점에 가기 전, 마지막 미련을 떨구는 소소하지만 다분히 의식적인 '두 번째이자 진짜 마지막 읽기'를 시작했다. 처음 접하는 책을 읽는 것과 다를 것은 없다. 중고서점에 헐값으로 무지막지하게 팔아치우는 내 행위에 대한 작은 명분일 뿐이다.   




  박완서 산문집 <호미>는 10년 전에 읽은 책이다. 처음 읽었을 때, 소소하지만 성실히 조리한 건강식을 먹은 듯했는데, 다시 읽어도 여전히 그렇다. 작가가 빚어낸 문장은 그분의 이미지만큼 푸근하고 소박하면서 때론 명징하다. 글이란 게 쓴 사람이 낳은 영혼의 자손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70대 중반을 넘긴 작가는 나잇값을 하기 위해 스스로 자각하고 노력하는 노년의 의식을 보여준다. 나이를 부끄러워하지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고, 마냥 유유자적하지도 않는다. 아파트 생활을 벗어나 흙마당이 있는 집에 화초와 나무를 가꾸며 겪는 노동과 해방, 자연과의 투쟁(?)에선 낭만과 고달픔이 동시에 느껴진다.



유년의 뜰을 떠난 후 도시에서 보낸, 유년기의 열 곱은 되는 몇십 년 동안에 맛본 인생의 단맛과 쓴맛, 내 몸을 스쳐간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격렬했던 애증과 애환, 허방과 나락, 행운과 기적, 이런 내 인생의 명장면(?)에 반복해서 몰입하다 보면 그렇게 시간이 가버린다. 70년은 끔찍하게 긴 세월이다. 그러나 건져 올릴 수 있는 장면이 고작 반나절 동안에 대여섯 번도 더 연속 상연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분량밖에 안 되다니. 눈물이 날 것 같은 허망감을 시냇물 소리가 다독거려준다.  


  일제 강점기 어린 시절부터 해방과 6.25 이후 젊은 시절의 회상은 작가의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화두다. 반복해 접해도 고루하지 않은 생생함이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에게도 같은 시절을 살아낸 듯 스산함을 안겨준다. 작가의 힘이고 글의 힘일 것이다. 먼저 간 그리운 이를 회고하는 글이나, 처마 밑 벌집을 발본색원하는 무모함을 고백한 글에선 작가가 솔직하고 진실하게 살았던 생활인이라는 게 느껴진다. 명성에 비해 크게 좋은 일도 못하고, 폐만 끼치지 않으려 했던 삶을 조금 자책하는 듯한 말투는 빈말이 아닐 것이다. 그분이 돌아가시면서 가난한 문인들에게 조의금을 받지 말라고 한 유언으로 생전의 자책을 무마시켰으리라 짐작해 본다. 본인의 말처럼 통 큰 기부는 못했지만, 내세우지도 감추지도 않은 인품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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