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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19. 2018

자비를 향한 항해

영화 <The Mercy> (2017)


  망망대해에 홀로 항해하는 작은 배! 인생을 상징하는 낡고 진부한 은유가, 은유가 아닌 실제인 삶을 목격했다. 이 거짓말 같은 실화는 보는 이를 허무하고 먹먹하게 한다. 어째서, 왜,라고 외치고 싶지만 오래전 바닷속에 가라앉은 그는 대답이 없다.


클레어와 도널드 크로우허스트


  1968년 영국. 단독으로 세계일주를 하는 요트 경주 대회가 열린다. 사업가 도널드 크로우허스트(콜린 퍼스)는 상금과 명성을 위해 대회 출전을 결심한다. 그는 항해용 내비게이터를 비롯해 배의 여러 장치를 만드는 회사를 운영하는데, 지지부진한 사업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에 떠밀려 돌파구를 찾던 중이었다. 자신이 만든 내비게이터를 요트에 장착해 대회에 출전하려는 것이다. 그는 전문 항해사도 아니면서 이 무모한 도전을 뭐에 홀린 듯 진행한다. 클레어는 남편을 걱정하지만, 차마 그의 꿈을 좌절시킬 수 없어 지켜본다. 도널드는 자신이 개발한 장비로 요트의 시속을 획기적으로 올릴 수 있다고 설득해 스폰서를 구하고 요트를 제작하는데, 생각보다 일의 진척이 더디고 장비에 문제가 생긴다.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합리적이지만, 이미 주위의 지나친 기대와 사업적 이권이 개입되면서 불안한 출발을 한다. 클레어와 아이들은 무사귀환을 기원하며 남편과 아빠를 떠나보낸다.


홀로 배에서 고군분투하는 도널드


  망망대해에 홀로 나온 도널드는 외로울 틈도 없이 곧바로 문제에 봉착한다. 배는 생각보다 엉성하고 불완전하다. 요트의 장치와 부속품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물이 센다. 망망대해의 고립은 공포 그 자체다. 멘붕이 된 그는 불안한 배와 다른 경쟁자를 의식하며 조바심 낸다. 도널드는 이쯤에서 포기할 수도 있었다. 아니, 해야 했다. 대회를 포기하면 닥쳐올 엄청난 후폭풍은 감당해야겠지만, 합리적 판단이 가능한 이성이 남아있을 때, 자신과 가족의 인생을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을 때 그만두어야 했다.  


  항로를 전송하고, 가족 및 대회 관계자들과 무전으로 연락하면서 도널드는 점점 냉정을 잃어간다. 기대에 찬 그들의 목소리는 절망적인 현실을 덮어버린다. '나만 입 다물면 모두가 행복할 거야, 꿈을 잃지 않은 채.' 그의 절박한 희망사항은 자신을 배반한 상황에 눈을 감게 한다. 도널드는 항해 경로를 거짓으로 전송해 다른 경쟁자들보다 월등히 앞선 것처럼 꾸민다. 그의 고무적인 여정은 가족과 관계자들을 들뜨게 하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의도했던 것보다 일이 커지자 그는 절망적으로 자포자기한다. 다른 경쟁자들마저 속속 나가떨어지고, 대회의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자 그는 결단을 내린다.


점점 절망하는 도널드


  끝내 돌아오지 않은 그가 남긴 건, 거짓으로 전송한 항로가 아닌 실제 경유했던 바다를 기록한 항해일지뿐이다. 자신이 행한 기만과 함께 바다에 투신한 그에겐 변명도 사과도 자책도 들을 수 없었다. 무엇이 이 남자를 이토록 무모하고 처절하게 만들었을까. 그가 온몸으로 감싸며 자신과 함께 수장시킨 진실은 무엇일까.  


  그는 시계를 바다에 던진다. 작은 요트에 어울리지 않은 커다란 벽시계는 그와 가족의 인생, 삶의 여정의 상징이다. 6개월이 넘는 고립무원에서 몇백 번 몇천 번을 되뇐 가족들과 함께 했던 시간, 그를 기다리며 견디고 있을 현재의 시간, 그리고 앞으로 그들에게 닥칠 시간이다. 그는 이 시간의 압박에서 해방되고 싶었을 것이다. 요트 경주는 곧 시간과의 싸움이다. 출발과 도착은 제각각이어도, 항해한 절대 시간이 가장 짧은 사람이 우승하는 경주다. 그가 항로를 속이고 항해 일지를 거짓으로 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시간을 속일 수는 없다. 무사히 살아 돌아가도 바다에 홀로 있었던 모든 순간은 그의 생에 자책과 모멸로 남을 것이다. 그는 이루지 못한 꿈과 견딜 수 없는 시간과 함께 바다로 들어갔다. 오욕과 비방은 남은 가족들이 어느 정도 감당해야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진실은 함구한 채 미지로 떠난 것이다.     



  그의 생의 마지막 자비(the mercy)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죽음으로 지켜낸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불명예? 미스터리로 남은 기만? 그가 모든 것에서 손을 놓은 채, 잔잔한 바다 위에서 빛나는 태양을 올려다보는 모습은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자비는 후회와 자책이 아니라, 포기할 수 있는 결단과 세상에서 자신을 소외시킬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싶다. 그가 자신에게 허락한 자비가 너무 늦어서 안타깝다.


   온갖 역경을 극복한 인간 승리의 드라마가 아닌 이 자비 없는 비극은, 역설적으로 절망을 품고서라도 인생이란 여정을 묵묵히 항해하라고 독려하는 것 같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있는 기분은 나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데서 오는 묘한 안도감이 이 영화의 가장 자비로운 점인 듯 싶다. 냉정한 세상에서 꿈은 이루어질 때보다 안 이루어질 때가 더 많다. 그래도 대다수 사람들은 크게 좌절하지 않고 살아간다. 꿈은 무자비할 때가 많지만, 세상은 자비로울 여지가 많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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