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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17. 2018

심장을 겨누는 잔혹한 딜레마

영화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2017)


  살아서 요동치는 심장의 클로즈업에서 시작된 영화 <킬링 디어>는 피 흘리며 멈추는 심장으로 끝난다. 심장과 심장 사이에 있었던 일은, 뛰는 심장을 눈으로 직접 본 것만큼이나 사실적이면서도 기괴하다.


  외과의사 스티븐과 아내 애나는 성공한 중산층 여피족이다. 교외에서 딸과 아들을 키우며 여유롭게 살지만 왠지 부자연스럽다. 딱히 트러블이 있는 건 아닌데, 이 가정엔 가족 특유의 끈끈한 정보다는 극단적인 완벽함을 추구하는 차갑고 메마른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스티븐이 간간이 만나는 십대 소년 마틴도 뭔가 심상치 않다. 그는 스티븐이 집도하는 수술을 받다 죽은 환자의 아들이다. 의료사고라 밝혀진 건 아니지만, 술을 마시고 수술한 스티븐은 양심 때문인지 마틴을 만나 선물도 하고 나름 신경 쓴다. 마틴은 그런 스티븐을 교묘하게 이용하며 불편하게 한다.


심장 전문의 스티븐


  어느 날, 스티븐은 마틴을 집으로 초대해 가족들에게 소개한다. 단란하고 행복해 보이지만 경직되어 있는 가족들은 낯선 소년의 등장에 잠시 활기를 띤다. 보답으로 마틴도 스티븐을 자기 집에 초대하는데, 마틴 엄마가 노골적으로 유혹하자 스티븐은 뿌리치고 그 집을 나온다. 명확히 보여주진 않지만 한 화면에 있는 것만으로도 스티븐과 마틴의 관계는 긴장감이 감돌며 불안하다. 이런 느낌은 지체 없이 실체를 드러내며 그로테스크한 상황으로 전개된다.


스티븐 가족 주위를 맴도는 마틴


  스티븐의 어린 아들 밥의 다리가 마비된다. 갑자기 시작된 증상은 원인도 병명도 알 수 없다. 답답해하는 스티븐에게 마틴은 대놓고 저주를 퍼붓는다. 그가 자신의 가족 한 명을 죽였으니, 그의 가족도 한 명 죽어야 한다며 누굴 죽일지 스티븐에게 선택하라고 종용한다. 안 그러면 차례로 다 죽을 거라고. 마틴의 불길한 말은 사실로 드러난다. 아들에 이어 딸 킴의 다리도 마비된다. 그다음엔 아내 애나 차례가 될 것이다. 애나는 남편이 수술실에서 한 실수 때문에 감당해야 할 현실에 분노한다. 그녀는 병상에 있는 아이들을 돌보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는데, 스티븐은 그런 가족을 보며 참담한 심정에 어쩔 줄 모른다. 마틴을 납치해 구타하고 협박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스티븐의 딸 킴


  시간이 갈수록 절망과 공포에 휩싸인 가족은 누구 하나의 희생을 기다리며 서서히 분열되어 간다. 애나는 아이들은 또 낳을 수 있으니 아이들을 죽이라고 남편에게 속삭인다. 성치 않은 다리로 도망가다 걸린 킴은 아버지를 위해 희생하겠다며 가증스러운 아부로 목숨을 구걸한다. 어린 밥은 아빠 말에 순종하는 제스처를 하며 무언의 애원을 한다. 해체될 위기에 놓여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뭉칠 수밖에 없는 운명공동체인 가족의 민낯은 서늘한 게 아니라 오싹할 정도로 공포스럽다. 결국 스티븐은 가족들의 눈을 가리고, 자신도 눈을 가린 채 랜덤으로 총구를 겨누어 한 명의 심장을 저격한다.    


스티븐의 아내 애나


  이 영화에선 어떻게 이런 저주가 가능한지가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다. 어째서 마틴에게 그런 힘이 있는지, 이 가족을 마비시키고 움직이는 실체는 무엇인지 일언반구도 없다. 의사 부부와 자녀들은 이런 상황을 공포스럽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복수의 저주를 실행하는 힘보다는, 그런 힘에 휘둘리고 지배당하면서 변하는 개인의 실체에 더 주목하라는 뜻인 것 같다.




  이 기묘한 부조리극이 진짜 무섭게 느껴지는 건, 서로에게 이타적인 가족이 가장 무서운 타인이 되는 게 한 순간이라는 사실이다. 어차피 한 명만 죽으면 되는데 다 같이 죽을 순 없다는 이성과 논리는, 원초적 공포와 생존 본능으로 둔갑해 부모 자식 간의 타살을 부추긴다.


  실존적 공포보다 더 오싹한 가족 이데올기의 해체는, 저주가 아니라 현실이다. 마비와 공포, 희생과 타살은 가족이라는 운명공동체가 해체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원인의 상징이다. 누구도 자신보다 소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설령 가족이라도 말이다. 물론 세상엔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부모도 흔하다. 그런 부모의 정상적인(?) 희생에 반기를 드는 게 이 영화의 목적은 아닌 듯 싶다.


  ‘생명’이 너무 극단적이라면 ‘돈’을 담보로 가족 구성원이 연대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이라 가정해 보자. 책임을 회피하고 빠져나갈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러고 싶지 않을까. 돈 앞에서도 그런데 하물며 목숨이야 말할 것도 없다. 타인은 함부로 강요하지 않는 것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시스템은 무너지고 있다. 이기적인 개인이 이룬 가정은 개인의 행복을 위해 가정이 존재하는 게 당연하지, 가정의 행복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길 거부한다.

가장 어리고 아픈 희생양 밥


  다리 마비에 이어 동생 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자 킴은 너무도 밝고 힘차게 외친다. "아빠, 밥이 죽어가고 있어요!" 그 아이는 동생이 희생되면 자신은 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을 것이다. 누가 이 무시무시한 생존 본능과 환희를 비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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