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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22. 2018

세 번이나 봤지만 또 볼 영화

<나는 사랑과 시간과 죽음을 만났다 Collateral Beauty>

  내 생애 두 번 이상 본 영화는 손가락에 꼽는다.

  1993년 7월 어느 날, 개봉한 첫날 첫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밥도 안 먹고 내리 다섯 번 본 <쥐라기 공원>은 레전드로 남아있다. 대기업 프랜차이즈 영화관이 생기기 전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볼 때마다 눈물을 참을 수 없는 <E.T.>는 열 번도 넘게 봤다. <사운드 오브 뮤직>과 <쿼바디스>는 TV에서 3,4년 터울로 서너 번 본 것 같다. 그 외에 어린 시절 본 영화들을 가끔 추억에 이끌려 찾아보긴 하지만, 대부분 한 번으로 끝낸다. 영화는 그대로인데 내가 변해서인지 두 번 째는 안 본 것만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답지 않게 세 번이나 보고 또 다음을 기약한 이 영화의 원제는  <COLLATERAL BEAUTY>(2016)다.  '부수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사전적 번역은 상당히 부정확한 해석이다. 영화 속 대사를 인용해 '삶의 고통이 주는 아름다움' 정도로 의역하는 게 그나마 타당할 듯싶다. 영미권에서도 쉽게 쓰이지 않은 심오한(?) 개념이라 하니 완전무결한 해석은 바라진 않는다.


고통에 빠져 현실을 외면하는 하워드


  뉴욕의 광고회사 CEO 하워드 인릿(윌 스미스)은 성공한 기업가다. 친구들과 함께 회사를 경영하며 승승장구하는데, 어린 딸의 죽음은 그의 인생을 한 순간에 산산조각 낸다. 친구들은 도미노만 하며 페인처럼 사는 그를 걱정하는 한편, 회사를 살리기 위한 대책을 강구한다. 하워드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걸 증명해 회사를 합리적으로 매각하려는 것이다.


  어느 날, 하워드에게 이상한 일이 생긴다. 자신을 '죽음'이라 지칭한 늙은 여자가 공원에서 말을 건다. 죽음이 뺏어간 것을 원망하고 비난했던 하워드의 질문에 답을 해준다. 자신이 '시간'이라는 청년은 하워드가 언제나 부족하고 인색하다고 욕한 시간에 대해 거칠게 반박한다. 사랑 때문에 행복했는데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 심정을 토로한 물음엔 낯선 젊은 여자가 다가와 눈물로 호소한다. 고통을 비롯한 세상 모든 것엔 사랑이 있고, 그것을 외면하며 살아선 안 된다고 말하는 그녀는 자신을 '사랑'이라고 한다.   


죽음, 사랑, 시간


'죽음'에게 쓴 편지의 답변을 받는 하워드


  하워드는 혼란스럽다. 딸이 죽은 후, 잠 못 드는 밤에 쓴 편지에 이런 답장이 올 줄 몰랐던 것이다. 편지의 수신인은 사랑, 시간, 죽음이다. 기업인으로 잘 나간던 시절, 그는 광고를 만드는 철학으로 사랑과 시간과 죽음을 얘기했었다. '사랑, 시간, 죽음은 모든 이들의 삶에 연결되어 있다. 사랑을 갈구하고,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지금, 그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비난할 대상으로 사랑과 시간과 죽음을 선택해 편지를 썼다. 그리고 자신이 보낸 편지에 기이하고 엉뚱한 방식으로 답장을 받는다.     


  하워드가 받은 세 가지 답장은 그의 친구들이 꾸민 연극이다.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는 그를 위해, 그의 세계에 눈높이를 맞춰 그가 편지를 보낸 개념들이 답변을 하게 한 것이다. 친구들은 무명 배우들을 고용해 기만과 위로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그를 치유하는 한편 회사 경영에서 손을 떼게 하려 한다.


하워드와 친구들


  기이한 일을 겪고 마음이 복잡해진 하워드는 그동안 외면했던 한 여자를 찾아간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상담 치료하는 매들린 역시 3년 전에 희귀 암으로 여섯 살짜리 딸을 잃었다. 아직도 죽은 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못하는 하워드는 그녀와 이야기하는 동안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매들린과 하워드


  사랑과 시간과 죽음은 목적을 달성한다. 아니, 이 일을 작당한 하워드의 친구들은 목표한 데로 그의 경영권 포기 서명을 받아낸다. 하워드는 친구들이 꾸민 짓이란 걸 알고 허탈해하지만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그들의 심정을 이해한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매들린을 찾아간 그는, 그녀의 딸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죽은 딸의 이름과 병명을 비로소 말하며 오열하는 하워드. 매들린은 아이를 잃은 후 이혼한 그의 아내다.


하워드의 세 친구 위트, 클레어, 사이먼


  죽음과 사랑과 시간은 하워드뿐만 아니라, 이 일을 작당한 그의 세 친구들에게도 답변을 해준다. '시간'은 회사에 젊은 날을 바치고 가임기가 얼마 안 남은 클레어(케이트 윈슬렛)에게 당신 자식은 꼭 당신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니라며 시간에게 졌다고 생각하지 말라 한다. '죽음'은 다발성 골수증을 아내에게 숨기고 있는 사이먼(마이클 페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할 시간을 줘야 한다고 충고한다. '사랑'은 이혼남 위트(에드워드 노튼)에게 딸이 태어났을 때 느꼈던 경이로운 감정을 일깨워주며, 아빠를 거부하는 딸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조언한다.    


  "네 딸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딸의 허락은 필요하지 않아. 앨리슨은 이 세상에서 네가 지닌 최고의 보물이야. 그리고 '나중에'라는 시간은 보장되지 않아."

  

  딸의 죽음을 드디어 인정한 하워드가 덤덤하지만 먹먹하게 친구에게 한 말이다.

 



  세 번이나 봤지만 이 영화가 말하는 '삶의 고통이 주는 아름다움'의 개념은 아직 선명하지 않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것이 더 적확할 것이다. '삶의 고통이 주는 아름다움'은 '삶의 고통만이 주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얼핏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도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게 인간의 삶이다. 살려고 태어났어도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고통 속에서 애써 아름다움을 찾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안 그러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피할 수 없는 생의 고통을 무슨 수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네 번째로 보면 삶의 고통이 주는 아름다움을 감지할 수 있을까. 몇 번을 더 봐야 이 아름다운 영화를 지울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장착된 눈물 나는 반전을 속속들이 꿰고 있어도, (나답지 않게) 1년에 한 번씩 볼까 생각 중이다. 사는 내내 몇 번을 더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시간'과 '사랑'과 '죽음'만이 답해줄 수 있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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