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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25. 2018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영화 <Good Night and Good Luck> (2005)

두려움에 굴복해서는 안돼!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미국 방송사 CBS에서 뉴스 맨으로 명성을 날렸던 실존인물 에드워드 R. 머로가 한 말이다.  


머로와 프로듀서 프레드 프렌들리는 뉴스 다큐멘터리「SEE IT NOW」를 진행하며, 매회마다 사회 정치적인 뜨거운 이슈를 던져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1950년대 초반, 미국 사회를 레드 콤플렉스에 빠뜨렸던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은 공산주의자 및 친 공산주의자들을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반 사회적 스파이들로 규정하고, 사회 각 분야에 걸쳐서 대대적인 빨갱이 색출 작업에 열을 올린다.


에드워드 머로


극에 달한 맥카시의 레드 혐오증으로 인해, 공산주의와 상관없는 무고한 사람들까지 빨갱이로 몰리지만 두려움 때문에 그와 맞서려는 사람은 없다. 이때, 머로와 뉴스 팀은 위험을 무릅쓰고 「SEE IT NOW」에서 매카시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고 레드 콤플렉스의 부당한 실체를 보도한다. 한 사람의 그릇된 광기는 용감한 언론인들의 양심적 보도로 결국 몰락한다.


프렌들리와 머로


의심스러운 정보의 진위를 파헤치고, 부당하게 주권을 침해당하는 사람들을 보호할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언론의 소명이고 책임이다. 사안에 따라, 양심과 직업의식만으로 하기엔 쉽지 않은 일도 있다. 지금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권력의 시녀가 된 매체들과 정권의 하수인인 기레기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소명과 양심을 저버리는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두려움에 맞서는 언론인들의 생존 방법을 에두르지 않고 정공법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오직 '진실'의 힘을 믿는 것이다. 거짓과 악의에 찬 선동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객관적인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머로가 매카시 의원의 악랄한 반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진실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머로 자신이 제일 잘 알 것이다. 자신을 공격하는 칼날이 날조되고 왜곡된 허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권력자나 위정자들의 위력에 맞서는 건 목숨을 내놓는 용기를 필요로 할 때도 있다. 목을 겨누는 칼날 앞의 유일한 방패는 진실뿐이다. 진실이 공개되는 순간, 언론인들은 세상으로부터 보호받고 위정자의 칼날은 무뎌진다. 물론 가려진 진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집요하게 파헤쳐야 한다. 장기적으로 볼 때 그것만이 그들이 오래, 안전하게 살아남는 길이다.


뉴스팀의 회의


문제는, 과연 진실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내 신념에 부합하는 매체를 선택해도 그 또한 객관적 사실과 진실만을 보도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소명을 갖고 양심적 보도를 한 언론이 위정자가 설계한 빅 픽처에 당한 것이라면, 그의 어리석은 양심을 꾸짖어야 하나,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원망해야 하나. 과오가 드러나자 스스로 몰락한 정치인의 신념은 거짓인가 진심인가. 권력의 악의 없는 실책은 실수로 봐주기엔 엄청난 재난을 동반한다. 눈 앞에 드러난 객관적 실체를 믿지 못하고 인지부조화에 매몰된 연장자들은 어쩌면 좋은가. 그들이 자신들을 제외한 세상이 왜곡되어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면, 그들의 신념은 진실인가 아닌가. 적어도 그들에겐 진실인 이 허상을 어떻게 깨부수어야 하나.     


두려움을 극복하는 진실이야 말로, 우리가 가장 의심하고 두려워해야 할 허상인 동시에 실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노력을 멈출 수 없는 건, 평생 두려움에 지배당하며 살지 않기 위해서다.

 

연출자 조지 클루니


60여 년 전의 아둔하고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여준 이 영화는 담담한 흑백 화면에 오히려 선명하게 붉은 광기와 저널리즘의 투지를 담아낸다. 직접 연출한 조지 클루니는 극적인 구성없이 뉴스를 보도하듯, 철저한 고증을 통해 사실에 입각한 사건만을 재구성해 보여준다.


50년대 미국 방송 언론의 실상은 남녀 차별이 팽배했고, 동료의 죽음을 야기시키는 비정한 행태도 묵인할 정도로 냉정하다. 사내 결혼을 용납받지 못할 만큼 인권이 보장되지 못한 집단에서 사회 정의를 위해 비장하게 일하는 모습이 좀 아이러니하다. 스폰서의 압박은 방송사를 짓누르고 딱딱한 보도는 대중들에게 외면받기 일쑤다. 그 와중에도 진실을 추구하는 뉴스맨들은 고집스럽게 투쟁한다.


알고 싶지 않은, 알아서 고통스러운 진실을 다룰 땐 더욱더 치열해지는 저널리즘의 사명을 이야기하는 게 이 영화의 사명인 듯싶다. 진실을 위해 투쟁하는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은 더 나약해지고 안일해졌기 때문이다. 매카시즘 못지않은 노골적인 광기는 이제 손꼽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널려있다. 새삼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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