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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27. 2018

매혹의 잔인한 대가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 The Beguiled> (2017)

  매혹하는 사람은 매혹당한 사람 위에 군림하며 관계를 주도한다고 여긴다. 어느 정도는 타당하지만, 상당한 감정적 에너지를 요구하는 '매혹당함'은 그에 상응하는 만족이 주어지지 않으면 전복되기 쉬운 감정이다. 다수를 일방적으로 끌어당기는 스타의 경우, 가장 열렬한 팬이 가장 잔인한 안티 팬으로 돌변할 수 있는 개연성에 노출되어 있다.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의 주도권을 쥔 자의 오만과 착각은 뜻하지 않게 잔인한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여자들만 사는 기숙학교


  1864년, 남북전쟁이 한창인 미국 버지니아 주. 부상당한 북군 병사가 여자들만 있는 기숙학교에 들어온다. 적군을 신고할 의무가 있지만 교장 미스 마사는 그를 은닉하며 부상을 치료해 준다. 학생들을 비롯해 여자 일곱 명이 사는 이곳에 불시착한 군인 존은 곧 미세한 파문을 일으키며 긴장을 유발한다. 절제되고 은근한 미스 마사의 욕망, 순진함을 내세운 처녀 교사 에드위나의 거부할 수 없는 눈길, 노골적으로 도발하는 십 대 알리시아, 그리고 어린 소녀들 마저 존이란 '남자'를 강렬히 의식하며 동요한다.  


여자들의 우두머리 교장 '미스 마사'


  차츰 회복하며 무기력한 부상자에서 강한 남자로 변모한 존은 힘쓰는 일을 도와주며 여자들 사이를 누빈다. 그녀들의 들뜬 설렘, 미묘한 눈길과 몸짓이 뿜어내는 유혹 속에서 그는 자신만이 줄 수는 희귀한 '남성성'에 도취된다. 그녀들의 갈망은 그의 오만함을 부추기며 선을 넘게 만든다.


존과 알리시아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이 위험한 욕망은 결국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각자의 절박한 갈망이 불러온 돌발 상황은 전시에 생존을 무너뜨리는 위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유일한 수컷은 암컷 무리 속에서 제왕이 아니라 제물이 된다. 영리하고 실리적인 여인들은 이 트러블 메이커를 보며, 한 사람이 차지하는 잔인한 상황보다 그 누구도 갖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택한다.


존과 에드위나


  부상 후유증을 이유로 그의 다리를 자르는 미스 마사. 깨어나 상황을 알게 된 존이 비명 지르며 내뱉는 욕지거리는 그가 자신의 생명의 은인들을 은연중에 농락하고 이용했다고 짐작하게 한다. 매혹을 보이콧한 여자들의 잔인한 연대는 침착하고 은밀하게 진행된다. 그들은 욕망을 생존보다 아래에 둔다. 가장 순진하고 어린 소녀가 가장 적극적으로 그를 살해하는데 가담한다. 배신당한 처녀는 그를 상대로 욕망을 채우는 몸짓을 시도하지만, 사랑이나 존중은 결여된 짐승 같은 욕망만 확인할 뿐이다.


  '유일한 남자'라는 전략적 우위로 일방적으로 여자들을 매혹한 그는 무엇을 잘못했던 것일까. 유혹하고 유혹당하는 건 은밀한 밀당이 오가는 상호작용이다. 유혹의 과정만 보면 그의 일방적인 잘못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간과한 게 있다. 욕망을 거부당한 여자들의 잔인한 연대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 혹시 그녀들 모두를 품을 수 있을 거라는 건방진 과대망상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닐까. 섬세하지 못한 이 남자는 잔인한 여자들에게 당한 게 아니다. 본질을 알지 못했던 치명적인 '매혹'에 거부당하고 대가를 치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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