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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30. 2018

저항할 수 있는 자유

영화 <DISOBEDIENCE> (2017)

  살다 보니 중요한 게 자꾸 바뀐다.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 성취, 물론 중요하다. 나이 먹을수록 점점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나의 외적 내적 세계가 견고하지 못할 때 엄습하는 불편과 불안은 압박이 될 때도 있다. 그러나 내가 가장 견디고 싶지 않은 건 나의 '자유 의지'가 침해당하는 것이다. 인간적 도리나 세상의 잣대에 크게 어긋나는 게 아닌, 아주 사소하지만 명백한 개인적 자유는 그 누구에게도 간섭받고 싶지 않다. 그게 누구이든 간에.  



  랍비인 아버지 사망 소식에 고향에 온 사진작가 로니트(레이첼 와이즈)는 고향 친구이자 아버지 제자인 도비드를 만난다. 그녀의 등장에 당황하는 고향 사람들은 공동체 특유의 친근함과 경직되고 완고한 집단주의를 동시에 내보인다. 이런 분위기에도 꿋꿋하던 이방인 아닌 이방인 로니트는 역시 고향 친구이자 도비드의 아내가 된 에스티(레이첼 맥아담스)를 보자 흔들린다. 그녀는 로니트의 옛 연인이다.


  엄격한 유대교 율법이 지배하는 이 고장에서 레즈비언 커플은 용납될 수 없는 금기다. 로니트는 에스티를 떠나 뉴욕으로 갔고, 시간이 흐른 지금 에스티는 랍비인 도비드와 결혼생활을 하며 매주 정기적으로 임신을 위한 부부 생활을 하고 있다. 이곳 여자들은 모두 검은 옷차림에 자신의 생머리를 감추기 위해 가발을 착용한다. 이슬람교 여성들이 브루카로 자신의 신체를 가리는 것 못지않은 엄격한 규범이다. 유대교 공동체에서 유대인의 자식으로 태어나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성장했어도, 생명이 꿈틀대는 인간은 자신의 성적 취향과 생활 방식을 선택할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의지를,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명분으로 인간들이 억압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날 수밖에 없지만, 고향을 떠나는 사람은 극소수다. 대부분 그런 강요된 생활방식과 엄격한 종교적 규범을 자연스러운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동요 없이 순종하며 산다. 공동체가 주는 안전함과 태생으로 받아들인 종교는 쉽게 떨칠 수 없는 탯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에스티와 로니트


  에스티는 겁먹고 방황하지만, 로니트를 뿌리치지 못하고 자신의 사랑에 굴복한다. 공동체의 삶을 존중하면서도 본능적인 열망을 주체 못 하는 에스티가 가발을 벗어던질 때, 그녀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자 여자가 된다. 그리고 뱃속의 아이에게만큼은 자신의 삶을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고 선언한다.    




  대부분 그렇듯이, 인간과 종교의 싸움에선 인간의 의지가 더 강력하다. 인간이 강해서가 아니라, 신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창조하고 마지막에 남자와 여자를 만든 후 신은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동성애자건 이성애자건 양성애자건 종교적으로 보면 다 신의 피조물이다. 동성애가 인류의 번성을 더디게 하고 신의 뜻이 아니라는 '인간의 주장'은 나같이 종교가 없는 사람이 듣기엔 논리적이지 않다. (물론 신화와 종교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이럴 거면 신은 왜 그렇게 인간에게 다양한 성적 취향을 주신 건지, 왜 종교인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신에 반하는 '자유의지'를 주신 건지 모르겠다.


  이 영화는 '진실한 것이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거기에 덧붙여 나는 '자유가 진실한 사랑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에스티와 로니트의 사랑 못지않게, 아내(에스티)를 사랑하는 도비드의 사랑 또한 진실하다. 유대교 랍비인 그가 추문에 가까운 아내의 사랑을 이해하고 존중하기까지의 고뇌는 이 영화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아내와 친구의 사랑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그는 그녀를 존중했다. 그녀의 '자유의지'를 존중했기에 그녀에게 사랑보다 더 큰 자유를 준 것이다. 그의 이런 사랑이 감정과 열정에 충실한 로니트의 사랑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랍비에게 레즈비언 아내만큼 위험하고 용납하기 어려운 시련도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평생 따르고 가르치는 율법을 이해할 수 없고, 잘 모르겠다고 어렵게 실토한다. 그의 고백은 에스티의 커밍아웃만큼 힘들고 충격적인 스캔들이다. 엄격한 유대교 율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아직 젊은 이들이 평생 짊어져야 할 것이 어떤 것일지 나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지만, 그들의 자유의지만큼은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자유롭게 사랑하며 사는 모습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참 좋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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