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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Aug 05. 2018

극한 직업 ‘엄마’

영화 <Tully> (2018)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여자는 없다. 한 여성이 엄마가 된다는 것은, 예측 불가능한 난파선에 올라 생을 뒤집어 사는 듯한 경험을 죽을 때까지 한다는 의미다. 나 아닌 다른 생명을 세상에 내보내고 책임지는 건 가끔 경이롭긴 하지만, 신에 버금가는 막중한 임무와 책임을 지는 일생을 짓누르는 고해일 때가 많다.



만삭인 마를로


  보기만 해도 숨이 차는 만삭인 마를로(샤를리즈 테론)에겐 이미 두 아이가 있다. 40대 접어들어 생긴 셋째는 원치 않은 아이였지만 하늘이 주신 기적이라 여기며 출산을 기다린다. 자폐기가 있는 아들은 학교를 옮겨야 할 처지고, 남편은 착하지만 육아에 도움되진 않는다. 보모를 고용할 형편도 안되어 독박 육아에 시달리는 마를로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고달프다. 그녀는 밤중 모유 수유와 아직 어린 두 아이 육아로 점점 지친다.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하고 하루하루 어린아이들 틈에서 버텨내는 그녀의 일상은, 솔직히 기쁨보다는 시련을 감당해야 하는 박해받는 이교도를 연상시킨다. 죽을 만큼 힘든 마를로는 결국 오빠가 권한 '야간용 내니'를 부른다.   


'엄마'가 된 여자


  젊고 아름다운 내니 툴리(맥켄지 데이비스)는 마를로 대신 밤에만 갓난아기 미아를 돌본다. 처음엔 못 미더워한 마를로도 그녀의 도움을 받으며 점점 여유를 갖는다. 몇 년 만에 잠을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정돈된 집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툴리에게 깊은 우정과 연대를 갖게 된 마를로는 그녀에게서 미혼 시절의 자신을 느끼며, 눈부신 젊음과 자유를 부러운 듯 바라본다. 툴리는 아기뿐만 아니라 모든 걸 도와주기 위해 왔다며 마를로에게 따뜻하게 미소 짓는다. 가까워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속 얘기까지 하며 친자매처럼 지낸다.     


내니 툴리와 마를로


  어느 날, 툴리는 왠지 매말라 보이는 마를로에게 하룻밤 일탈을 제안한다. 마를로가 결혼 전 살았던 뉴욕 브루클린으로 한밤중에 원정간 두 사람은 진탕 술을 마시고 춤을 춘다. 술집에서, 더 이상 여자가 아닌 엄마가 된 자신을 자조하는 마를로에게 툴리는 아직도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며 용기를 북돋아준다. 그러면서 더 이상 내니 일을 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툴리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했던 마를로는 받아들일 수 없어 힘들어하고, 그날 밤 음주 운전 중 졸다가 다리 밑 강으로 추락한다.


  다행히 마를로는 무사하다. 그동안 그녀가 극도의 피로와 수면 박탈을 경험한 것 같다는 의사의 소견은 툴리와 지내면서 여유롭고 생기 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견해다. 극심한 육아 스트레스는 이상 행동을 하게 하고 극단적인 위험으로 몰고 갔지만, 마를로는 남편의 사랑과 아이들 덕분에 차츰 회복한다.  


육아에 지친 엄마


  마를로에게 꿈처럼 환상처럼 다녀갔던 툴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녀는 마를로를 만난 첫날 말한다. "전 당신을 돌봐주러 왔어요." 마를로가 아기를 돌보러 온 거 아니냐고 반문하자, "당신은 거의 아기와 같아요."라고 한다. 태어난 지 몇 주 안된 아기는 엄마의 DNA와 세포를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만 보면 엄마와 거의 같은 개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기를 돌보는 툴리가 마를로를 돌본다는 것이 아주 이상한 궤변은 아닐 것이다. 사람 몸안 대부분의 세포는 아기 때부터 분열하고 재생해서, 원래의 세포는 하나도 남지 않고 새로운 세포로 거듭난다고 한다. 결국 인간은 원래 타고난 자신을 버린 채 끊임없이 변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단, 청각 세포만은 분열되어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를로의 삶은 나아질 것이다. 다정하고 선량한 남편과 커가면서 손이 덜 갈 아이들이 있는 삶은, 적어도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마지막 장면에서 남편과 이어폰을 나누어 끼며 듣는 음악은 두 사람이 연애 시절부터 즐겨 듣던 곡일 것이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청각 세포에 각인된 음악은, 육아에 지쳐 낭만이 사라진 현실 부부를 돈독하게 해줄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술까지 같은 두 여자는 오로지 단둘이 마주할 수 있는 밤에만 교류한다. 마를로의 남편 조차 '야간용 내니'에 대해 말만 들었지 잘 모른다고 말한다. 차사고가 났을 때 마를로를 구해준 인어는 정말 툴리였을까. 마를로는 병실로 찾아온 툴리에게 나이는 내가 많은데 왜 니가 더 어른스럽냐고 묻는다. 툴리는 마를로를 위해 나타난 요정이었던 걸까. 아니면 너무 지친 마를로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을 감당하기 위해 소환한, 분열되고 재생되기 전의 젊고 생기 있는 자신이었던 걸까. 뭐가 됐건 마를로와 툴리는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아야 한다. 지친 엄마에게 필요한 건 요정도 환상도 아닌, 육아는 가족과 사회가 함께 감당해야 할 연대 책임이라는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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