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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Aug 09. 2018

설거지까지 요리이듯, 이별까지 사랑이다!

영화 <The Romantics> (2010)

"설거지까지 요리이듯, 이별까지 사랑이다!"

  몇 년 전 「마녀사냥」이란 프로그램에서 MC 성시경이 한 말이다. 사랑과 연애의 온갖 참상(?)을 다룬 프로그램에서 연애 경험이 꽤 있는 듯한 진행자의 멘트는 '저건 대본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온 말일 거야.'라고 짐작하게 했다. 그가 개인적으로 설거지를 비롯한 마무리를 잘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엄격하게 말해서, 세상 모든 사랑한다는 고백은 학살의 일부다."

  김소연 시인의 이런 적나라한 직시와 통찰은 공감을 넘어 감탄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평생 꿈꾸고 자행하는 학살은 얼마나 대량으로 유포되고 실행되는 것인지,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그 잔인하고 끔찍함은 영화가 종종 증명한다.   




  로라는 대학 시절 룸메이트이자 절친인 라일라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그녀의 집(저택)에 온다. 대학 때부터 절친 모임인 '더 로맨틱' 멤버들도 함께 도착한다. 로라는 라일라와 곧 결혼할 예비 신랑 톰과 대학시절 4년 동안 연인이었다. 로라는 그가 자신의 절친과 결혼하는 이 상황이 불편하고 어색할 수밖에 없다. 셋의 관계를 알고 있는 친구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아슬아슬하게 결혼식 리허설을 마친다.   


라일라의 결혼식을 위해 모인 '더 로맨틱' 멤버들


  철없이 화끈하게 젊음을 즐기던 청춘들은 현실을 고민하는 30대로 접어들었고, 각자 커리어를 쌓으면서 크고 작은 벽에 부딪친다. 기자인 로라는 자신이 아닌 부잣집 딸 라일라에게 청혼한 톰을 원망하고, 라일라는 톰과의 결혼을 앞두고 로라를 의식하며 불안해한다. 톰 역시 로라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해 방황한다. 친구들 중에 일찍 결혼한 커플은 흔들리고 있고, 결혼을 앞둔 커플은 확신 없는 미래로 갈등한다. 리허설 직후 갑자기 사라진 톰을 찾아 나선 친구들은 속내를 드러내며, 로맨틱하지 않은 현실에 반항하듯 각자 불장난 같은 하룻밤을 보낸다.   


결혼식 리허설


  톰이 로라 앞에 나타나 흔들리는 마음을 고백하자, 격렬하게 원망하던 로라는 그와 밤을 보낸다. 다음 날, 톰의 진심을 안다고 생각한 로라는 라일라에게  결혼을 만류한다. 라일라는 톰이 청혼한 여자는 자신이라며 로라의 감정 따윈 개의치 않는다고 받아친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묘한 긴장 관계에 있던 두 여자는 대학시절 해묵은 질투와 경쟁심까지 끄집어내 설전을 벌이다 감정의 극단까지 치닫는다.    


톰과 로라


  이 결혼식이 무사히 치러질지 아닐지 사실 별로 기대되지 않는다. 나름 똑똑하고 아름다운 두 여자가 한 남자 때문에 하는 짓은 민망하면서도 안타깝다. 이런 뭣 같은 사태는 세 사람의 합작품이지만, 가장 지탄받으며 무거운 책임감으로 상황을 수습해야 할 사람은 톰이다. 번지르르한 허우대를 지니고 머리 가르마를 어느 쪽으로 타야 할지조차 정하지 못하는 이 남자는 결정 장애 정도가 아니라, 범죄에 이르기 직전이다. 한 여자의 인생을 망친 죄, 다른 여자를 농락한 죄, 자신의 삶을 낭비하고 소모한 죄.


라일라와 톰. 이들은 무사히 결혼식을 할 수 있을까?


  성인 남녀가 결혼식 전날 바람을 피우든 말든 그건 당사자가 알아서 감당할 일이지만, 이 남자의 문제는 그런 행위의 차원이 아니라 여자들의 감정을 빤히 알면서 몇 달 동안 파렴치하게 갖고 놀았다는 것이다. 설거지를 하기 싫으면 요리를 하지 말던가 적어도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 뒷감당도 못할 감정을 질질 흘리고 다니며 두 여자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이 남자는 아무리 잘 생겨도, 아니 잘 생겨서 더 얄밉다. 그가 4년 동안 사귄 여자 친구가 아닌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있지만, 전 여자 친구와 유감없는 이별을 못한 채 결혼식장에 들어선 것은 용서받을 수 없다. 이별까지가 사랑이고, 떠나는 사랑에겐 예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남자는 하나의 사랑도 제대로 못하는 불능자다.


  결혼식 직전까지 전투는 여자들이 하고, 남자는 태연하게 결혼식장에 서서 신부를 맞이하는 동시에 신부 들러리를 흘끔거린다. 이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고백과 변명은 말 그대로 학살이고 재앙이다. 그의 감정이 아무리 진실하고, 흔들리는 마음이 인간적으로 이해받을 수 있다 해도, 그는 형편없는 요리사고 믿음 없는 연인이며 두 여자에겐 영원한 배신자다. 누가 되든 이 남자의 신부는 똥 밟은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얼굴 뜯어먹고 사는 게 아닌 이상(얼굴 뜯어먹고 산다 해도, 이 잘 생긴 얼굴도 곧 늙고 초라해질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그의 가르마를 감당할 여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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