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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Aug 26. 2018

해피 패밀리

책 <해피 패밀리> 고종석 장편소설 (2013년)

"나는 당신의 칼 없는 칼자루, 서랍 속의 난감한 편지, 봉합조차 뜯긴 세금계산서, 발가벗은 육필 엽서, 나는 당신의 순정 없는 심복, 꽃그늘 속 짓밟힌 꽃잎 여러 장, 심장을 꺼놓은 일렉트로닉 토이, 나는 당신의 숨겨놓은 독, 엎질러진 약병, 완벽하지 못한 타인, 나는 당신의 내부의 내부, 나는 당신의 잃어버린 한쪽 머리, 댕강댕강 달려 나가던 단종된 참수형 기계..."


  시인이 쓴 이 글의 제목은 무엇일까.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위선을 위악으로 드러낸 문장, 고개가 끄덕여지기보다 폐부로 훅 치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동의, 뇌와 심장의 괴리에서 오는 가책과 혐오의 뒤범벅.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 모든 걸 안고 살아야 한다는 자괴감과 연민의 끊임없는 변주. 시인의 저 문장들이 내가 세 번이나 읽은 책의 심장을 겨누는 칼끝처럼 느껴진다.    



  주인공 한민형은 아버지가 경영하는 출판사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는 30대 가장이다. 자신의 위선을 못 견뎌하는 이 남자는 위악으로 무장하고 발버둥 친다. 대학시절 붙여진 아도니스라는 별명답게 수려한 외모와 그보다 더 수려한 지적 능력을 가진 남자다. 명석한 두뇌와 숨 탄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까지 지닌 이 남자는 한 번 마셨다 하면 간이 녹아날 정도로 24시간 술을 마신다. 직장 상사인 아버지와는 어쩔 수 없이 대화하지만 어머니와는 의절하다시피 산다. 그러면서도 장모는 살뜰하게 모신다. 야망도 없고 내일도 없는 것처럼 살지만, 아내와 딸에겐 다정한 가장이다. 이 종잡을 수 없는 남자가 대체 왜 이러고 사는가 싶지만, 그가 왜 그러는지, 아니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는 책장을 덮는 순간 알게 된다.  


  한민형을 중심으로 그의 아버지 한진규와 어머니 민경화, 여동생 한민주와 한영미, 후배 이정석, 장모 강희숙, 아내 서현주, 딸 한지현, 그리고 몇 해전 자살한 누나 한민희까지. 각 인물들의 내면 고백에 가까운 서사가 펼쳐지는 동안, 이 '해피 패밀리'의 어두운 비밀과 과거가 드러난다.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못한 이 집안의 이야기는, 남매의 사랑이 가져온 참담한 충격과 참척을 겪은 후일담이다. 사랑보다 폐륜에 가까워 보이는 사건은 충격과 경악으로 가족들의 가슴에 화인처럼 남아있지만, 정말 이게 그 정도의 일인가 싶을 정도로 당사자들의 고백은 덤덤하게 들린다. 사실 고백이랄 것도 없다. 그 누구의 입에서도 직접적인 관계 묘사는 안 나온다. 그저 그들과 함께 살며 지켜봤던 가족들이, 각자의 시선에서 과거와 현재를 얘기할 뿐이다.


  가족이라도 다 알 수 없는, 가족이라서 다 알릴 수 없는 각자의 내밀한 고백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다들 아름다우면서도 추하고 서글프다. 생명체가 지닌 원죄는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필멸이지만, 인간의 원죄는 거기에 보태 근친에 대한 남다른 정과 의무가 아닐까 싶다. (함께 자식을 낳을 정도로) 너무 가까워도 안 되지만, 증오하고 실망스러워도 마음에 없는 도리를 해야만 완성된 인격체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수양딸과 친딸을 차별하고, 아들 친구들이 놀러 오자 거짓말까지 해가며 반찬을 숨기는 비열한 짓을 할 때, 내 엄마지만 솔직히 역겨울 수 있다. '역겨운 엄마'라는 말은 차마 입 밖에 내기 힘들고, 그 자체가 용납하기 힘든 모순 형용처럼 여겨지는 암묵적인 정서가 우리 사회에는 있다. (솔직히 자기 엄마가 역겨워도) 이런 말을 마음 편히 쓸 수 있는 자식은 세상에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성녀도 아니고 나에게 희생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인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일 경우가 많다. 자기 자식을 위해 다른 사람을 (본의 아니게 or 일부러) 해치는 엄마도 있다. 그런 엄마는 오히려 자식을 위해 죄를 짓는 극적인 모성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한민형이 가족과 맺는 관계 중, 어머니 민경화에 대한 증오는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아버지에게는 의례적이긴 하지만 예의 바르게 대한다. 입양한 동생 영미를 각별히 보살필 정도로 인간적인 데 반해, 어머니를 향한 가시 돋친 행동은 굉장히 서늘하다. 지병이 있는 장모를 모시고 살면서 살갑게 대하는 것과 대조되어 더욱 그렇다. 민경화는 속물스럽고 비열하지만 상종 못할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입양한 애보다 친자식을 더 예뻐하는 게 본능이고, 똑똑한 자식을 가진 중년 여자가 가질만한 이기심과 탐욕 좀 드러낸 게 큰 죄가 아니라면, 그저 보편적인 대한민국 중산층 엄마일 뿐이다. 딸과 아들의 관계에 기함하고, 자식을 먼저 보낸 참척을 겪은 걸 감안하면 오히려 자식들의 위로를 받아야 할 불쌍한 여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경화보다 한민형의 심정에 이입되고, 그가 어머니를 배척하고 사는 게 십분 이해된다. 민경화의 비열함과 한민형의 고뇌(?) 중 어떤 게 더 크고 공감하는가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한민형과 한민희의 관계는 사회의 관습과 유전적 합리성을 거스르는 충격적인 것이긴 하지만, 믿었던 자식들에 대한 배신과 고통을 민경화가 어떻게 표출했을지 생각하면, 한민형이 어머니를 모질게 대하는 게 그나마 죽지 않고 버티는 원동력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한민형과 한민희의 애정은 가정 안에서 비롯됐다. 부족함 없이 살게 해 주고 공부시켜줘도 자식은 부모에게 은연중 더 나은 것을 기대한다. 이를테면 따뜻한 인정과 배려, 도덕적 양심, 남을 생각하는 이타적인 모습 등을 내 부모에게서 찾으며, 그들이 좋은 사람이고 난 그런 사람들의 자식이라는 걸 뿌듯해하고 싶어 한다. 아직 어리고 순수한 자식들은, 내 입에 들어가는 것만 챙겨주기보다는 남들에게도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내 부모라는 자부심을 갖고 싶어 한다. 그게 너무 큰 욕심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대부분 평범한 부모들은 자기 자식은 끔찍이 챙겨도, 타인에게 존경받을 정도의 인정은 베풀기 쉽지 않다. 다들 그렇게 평범하게 살며 그게 꼭 나쁜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민형처럼 순진하고 높은 이상을 지닌 사람은 부모에게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아버지와 고등학교 교사인 어머니는 마음만 먹으면 사회적으로 모범이 될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람들이다. 대단한 부와 명예를 지닌 건 아니지만, 적어도 수양딸을 친딸처럼 키우는 인정을 보여주고, 아들 친구들에게 반찬을 아낄 만큼 얌체짓을 하지 않아도 될 여유가 있다. 명민한 아들은 어머니의 속물근성과 인정머리 없는 짓이 혐오스러웠을 것이다. (내 부모가 저런 사람이었다니.) 실망스럽고 끔찍한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방치하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엄마의 행동에 부화뇌동하는 친여동생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가 가족 내에서 누구에게 의지하고 소통했을지는 뻔하다. 물론 그런 정신적 방황이 근친 애정을 정당화하는 건 아니지만.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아름답고 의좋은 남매가 성장하여 애정관계를 갖는 건 충격적이지만, 그들이 혈통 보존을 위해 근친혼을 장려했던 18,19세기 유럽 왕가에서 태어났더라면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사실, 이런 말도 사족이다. 그냥 사고처럼 인생의 어느 길목에 덮친 행운과 불행일 뿐이다. 의지로 극복할 수 있었으면 그들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게 안되니까 운명으로 낙인찍고 평생 안고 사는 것이다.


위선이란 악이 선에게 드리는 경배라는 것을. 그러나 나는 선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림으로써 내 악을 눅이고 싶지 않다. 내 위선을 합리화하고 싶지 않다. 잘난 척하는 게 아니다. 글을 쓰든 안 쓰든 나는 위선자다. 나는 그걸 안다. 내 가족에 대해서도, 내 술친구들에 대해서도, 세계에 대해서도 나는 위선자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나는 위선자다. 그러나 글을 씀으로써 그 위선을 더 크게 만들고는 싶지 않다. 나는 어떤 글도 쓰지 않을 것이다.    


  한민형의 이 고백은, 그가 부모와 가정이라는 위선적인 관계와 사회를 박차고 나와 독립적인 인격체가 되어서 하는 양심선언으로 보인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기대를 받은 출중한 아이였다. 명문대를 졸업했고, 책을 써도 될 정도의 능력과 지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글과 글쓴이의 인격이 다르다는 걸 피부로 느끼고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제거해 버린 비관주의자다. 아니, 그전에 가족에게서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믿음을 깨는 것에서 그의 성장은 시작된다.


  친누나가 죽은 후, 그는 누나의 친구였던 아내와 딸 그리고 장모만을 가족이란 울타리에 편입시켜 의지한다. 자해에 가까운 폭음을 하지만 생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가 자신의 위선을 못견뎌하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허무주의자가 된 것은 타고난 패밀리 때문이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평범한 행복을 일구는 것은 스스로 만든 패밀리 덕분일 것이다. 그가 딸 지현이와 나누는 가족에 대한 대화는, 평생 벗어날 수 없지만 벗어나고 싶은, 그러면서도 존재 최후의 보루가 되는 가족을 만들고 싶은 의식적 과정으로 보인다. 그의 마음속에선 매 순간 부서지고 다시 생성되는 '패밀리'가 변신하는 동물처럼 꿈틀거리고 있을 것만 같다.


  웬만해서 같은 책을 두 번 읽지 않는 내가, 심상치 않은 내용의 이 책은 세 번 읽었다. 새삼스럽지만 고종석 작가님의 가독성 뛰어난 문장이 아름답고 서늘하기 때문이다. 한민형이 곁에 두고 읽는 프랑수아즈 파리스 소설 <행복한 가족>도 읽어보고 싶지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 이유는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참, 앞의 문장들은 김소연 시인이 쓴 글로 제목은 '부모 자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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