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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Sep 03. 2018

잔인하고 섬뜩한

책 <화이트 노이즈 White Noise> by Don DeLillo

  섬뜩하고 신랄하지만 유머러스한 스릴러를 읽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영상보다 글자가 주는 쾌감은 섬세하고 지적인 스릴러에서 돋보일 때가 많다.  


『화이트 노이즈 White Noise』는 1985년에 발표된 돈 드릴로(Don DeLillo) 소설이다. 제목인 '화이트 노이즈'는 가청 주파수의 모든 소리가 동시에 나서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못하는 전자음이라는 과학용어에서 빌려온 것이지만, 소설에서는 압도하는 정보와 상품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현대 미국의 상황과 죽음의 미망에 사로잡힌 주인공들의 상태에 대한 은유로서 그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고 공식적인 책 소개 설명에 나와있다. 현대 미국의 상황이라 하지만, 두 번째 읽은 지금이나 이 책을 처음 읽은 12년 전이나 1985년은 이미 20년 이상 지난 과거다. 놀라운 것은 스마트폰과 인터넷, 온라인 쇼핑만 빼고 책에 묘사된 상황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과 거의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 책에 두 살 정도로 등장한 제일 어린 인물 와일더가 지금쯤 30대 중반이 되었을 시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80년대나 지금이나, 혹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현대 문명사회는 대부분) 테크놀로지에 대한 맹신과 부작용으로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그 비판과 대안엔 소극적이다. 이미 맛본 물질문명의 편리는 각종 위험과 부작용에도, 건너자마자 불태운 다리처럼 돌아갈 수 없는 한계를 매 순간 갱신한다.



# 파동과 방사


  미국 동부의 한적한 소도시 블랙스미스에서 대학교수로 재직 중인 잭 글래드너는 재혼한 아내 배비트와 아이들을 키우며 사는 평범한 가장이다. 전공은 히틀러 연구로, 그가 발굴해 학문적으로 정립시킨 분야다. 잭은 미국에서 인정받는 히틀러 전문가이지만 독일어를 좀처럼 익히지 못해 애를 먹는다. 사춘기 아들은, 가족은 잘 보일 필요가 없는 시시한 집단이라 생각하는지 시종일관 삐딱하고 시니컬하다. 배비트의 딸 드니스는 꼬마 인민위원처럼 부모를 감시하며 고상하고 윤리적인 삶을 요구하고, 잭의 친딸 스테피는 혼자 비행기를 타고 친엄마 방문하는 걸 불안해한다. 잭의 전처들은, 그에 따르면 첩보원과 접촉하거나 히피 집단의 회계를 담당하는 범상치 않은 여자들이다. 아기 와일더만이 천진하고 무구한 신의 선물 같다. 재혼한 부부와 전 배우자들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로 이루어진 이 모던한 가정은 운명공동체이면서도 어린 자녀들과 부모 세대 간에 꽤 냉소적이다. 21세기 모던 패밀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오늘날의 인터넷과 스마트폰 대신, 매일 보는 텔레비전과 수시로 가는 쇼핑몰이 이 미국 중산층 패밀리 생활의 중심이다. 대학은 대량 생산 상품과 소비에 대한 학문적 정립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다. 광고와 상품 포장지를 분석하고, 유명인의 사생활을 수집하며, 영화의 특정 장면을 연구한다. 현대인의 소비 패턴과 미디어에서 생의 의미를 찾고, 대중문화에 대한 학구적 연구에 목을 맨다. 잭의 동료 교수 머레이는 수시로 쇼핑몰을 들락거리며 대량 유통과 소비야말로 이 시대의 정신을 드러내는 전형이라며 의미를 부여한다.     



# 유독가스 공중 유출 사건


  어느 날 이 지역에 유독가스가 유출사고가 발생한다. 잭은 당국의 지시에 따라 가족들과 피난 가다 (공기중 유독물질이라 알려진) 나이어딘 D에 노출된다. 개인이 겪는 개별적 불안과 공포는 개의치 않은 채, 당국의 대처는 어이없을 정도로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이다. 유독가스의 실제적 위험 정도는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사고를 대처하는 담당 기관은, 독가스 유출과 주민 대피라는 초유의 사태를 다음에 있을 유사한 사태에 대비한 데이터 자료를 만드는데 이용한다. 나이어딘 D에 노출된 사람들을 검사하고 데이터를 만들지만 치료나 해독에 대한 조치는 없다. 당장 내일 죽을지 20년 후에 죽을지 그 누구도 말하지 못한다. 아무도 정확히 모르지만, 뭔가 유해한 것임에 분명한 유독가스는 막연하지만 선명한 공포가 되어 잭을 지배한다. 공기 중에 떠있던 유독가스 덩어리가 사라지고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당국은 가상 대피 훈련을 하며 데이터를 축적한다.



# 다일러라마


  잭은 아내 배비트에게 자신이 유독가스에 노출됐단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남편이 먼저 죽을까 봐 늘 전전긍긍하는 그녀를 알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가 수상한 약을 먹는 걸 우연히 알게 되고 추궁 끝에, 죽음에 대한 원초적 공포 때문에 뇌신경 분야를 연구하는 집단의 실험대상을 자처했다는 말을 듣는다. 다일러라는 알약은 뇌신경세포에 작용해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소시켜준다는 향정신성 화학 물질이다. 배비트는 이 약을 얻기 위해 신약 개발자와 육체관계까지 가질 정도로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상습적으로 속이고 기만하는 건 전처들의 특기인 줄 알았는데, 가장 안정적이고 유쾌한 배비트에게 이런 비밀이 있었다니. 아내 얘길 들은 잭은 분노와 혼란 속에서도, 유독물질에 노출된 자신의 공포를 해소해줄 유일한 해결책으로 다일러를 갈구한다.




  각각 여러 번 결혼과 이혼을 하고 재혼한 잭과 배비트는, 랜덤으로 들렀다 가는 아이들까지 포함해 전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여러 명의 아이들을 키우며, 나름 안락하고 평범한 가정을 꾸린 중산층이다. 아이들은 어리지만 조숙하고 때론 암울하기까지 한데, 자는 모습을 보면 평온과 신성을 느끼게 한다. 핵가족마저 붕괴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부모와 어린 자식들 간의 냉소와 이해관계는 상충되지만, 하루가 저물면 갈등은 봉합되고 평화가 찾아오는 인스턴트적 신비가 이 가정엔 존재한다. 늘 가족 단위로 쇼핑몰에 몰려가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대량 소비를 하면서 공동체의 유대를 확인한다. 각자 은밀한 비밀과 상충하는 가치관을 가졌지만, (독가스 유출 같은) 위기 상황에선 긴밀하게 뭉치고 협조한다. 현대의 가정은 이 정도의 위기가 아니면 서로의 끈끈함을 확인할 기회조차 갖지 못할 거란 생각마저 든다. 이 또한 대량 생산과 소비, 값싸게 보편적으로 유통되는 대중문화가 낳은 삶의 양식 인지도 모른다.


  문명의 편리와 이기를 누리며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면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지배당하는 이 가족은,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새삼 묻게 만든다. 세련된 지혜와 최첨단의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어도 원시시대에 떨어지면 곡물 한 톨 만들 줄 모르는 인간이 과연 쓸모가 있는가 하는 하인리히(잭의 아들)의 물음은 엉뚱하면서도 심각하다. 유독가스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테크놀로지의 해악이라면, 다일러는 인간의 원초적 공포를 제거해 신경의 안정을 극대화하는 새로운 구원일지도 모른다. 사실 다일러 유사한 물질이 2018년 현재에는 상용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각종 신경안정제를 비롯한 향정신성 물질들 말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그 두려움을 조장시키고 왜곡하기도 한다. 나이어딘 D가 애초에 왜 생겨났는지, 그걸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다일러 같은 약이 왜 필요한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원초적 공포를 문명으로 극복하려는 발버둥은 인간의 왜곡된 욕망이라 작가는 말한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문명이 진보해도, 생명체의 소멸은 막을 수 없는 진리다. 그걸 극복하겠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욕심으로 인간다운 삶을 방해한다.


  대중문화라는 이름으로 시시콜콜한 정보에 열광하고, 자연 재난이 아닌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재난에 두려움과 더불어 경외감마저 느끼는 현대인들은 죽음과 공포마저 스스로 만들어내고 소비하는 길들여진 상업적 동물 같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상업적 우리(cage)를 벗어날 수 없는 현대의 인간에게, 문명과 기술은 당연하게 주어지지만 별 가치 없는 백색 소음인지도 모른다. 이 백색 소음의 파장 안에 뭔가 파격적인 (이를테면 인간의 뇌파를 조정해 살인 병기로 만든다거나 지능 저하를 유발하는 등) 힘이 있지 않는 한, 인간의 각성은 요원하고 우리 주위를 떠도는 백색 소음은 점점 늘어날지 모른다고 이 책은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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