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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Aug 17. 2018

빡침에 대응하는 조롱의 통쾌함

책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폭력과 상스러움> 푸른숲, 2002년

  요즘 진중권이란 남자를 TV에서 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10여 년 전부터 그의 책을 간간이 읽으며 대체 이 남자는 누구일까라는 존재론적(?)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막상 자주 보게 되니 신비감이 사라진 대신 상상만 했던 그의 실체에 대한 의문이 풀려 좋기도 하고 살짝 아쉽기도 하다.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꼈던 그는 출중한 말솜씨를 지닌 달변의 아이콘이자 날카로운 필력을 자랑하는 논객이다. 논리와 지식을 바탕으로 불합리한 세상을 비판하는 말투는 강하면서도 유머러스하다. 극우 세력의 행태에 빡쳐 살벌하게 까대지만, 까대는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조롱과 야유는 피식 웃게 만든다. 스스로 디스하거나 망가지기도 하는데, 진중함 속에 빛나는 냉소적인 유머는 이 미학자의 날카롭고 유쾌한 비판 정신을 온전히 드러내 보여준다. 그의 실제 말투가 온화하고 목소리가 나긋나긋하다(고 개인적으로 느꼈다)는 것은 정말 의외다. TV 프로그램에서는 그런 말투와 목소리로 신랄하게 까대고 비판하고 반박하다 어느 순간 말이 빨라지고 언성이 높아지기도 한다. 그의 주장과 논리를 수긍하든 안 하든, 나는 못하는 말과 나는 못 만드는 논리를 시원하게 쏟아내는 모습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도 있다.


  16년 전에 나온 이 책은, 일단 제목부터 살짝 유쾌하다. 르네 지라르의『폭력과 성스러움』을 비튼 『폭력과 상스러움』은 진중권 다운 발상이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고도 했는데, 그가 못할 게 뭐가 있을까. 10년 전에 읽은 책을 다시 펼쳐 든 건 책의 성격은 짐작 가는데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고, TV에서 본 진중권의 얼굴이 표지에 노골적으로 박힌 이 투박한 책이 우연히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책은, 읽을 땐 쾌감을 느끼지만 내용이 오래 저장되지 않는 단점이 있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다. 아마 쉽지 않은 내용과 시의성이 강한 매체 기고문을 모은 책이라 그럴 것이다. 『미학 오디세이』처럼 시의성을 타지 않은 학문적 성취의 결과물도 있지만, 몇 년 전에 읽은 그 책도 내용이 가물가물하긴 마찬가지다. (조만간 다시 읽을 생각이다) 아마 내 짧은 지식과 무지 탓에 읽으면서도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 실린 글을 쓸 때는 16,7년 전일 테니(어쩌면 그 이전일 수도 있다)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에 있었던 일에 대한 회고록처럼 읽히는 부분이 있다. 희한한 건 그때 일을 비판하고 조목조목 반박한 글을 지금 읽어도 크게 거부감이 없다는 것이다. 격세지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땐 그랬었지 정도의 감회는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다. 세상은 급격하게 변하는 것 같지만 의외로 고인 물처럼 정체되어 있는 부분도 있다. 한국처럼 급변하는 사회는 없다는 건 머릿속의 착각이고 피상적인 관념일지 모른다. 물리적인 세상은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빠르게 변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와 폭력에 가까운 불합리는 16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퇴보하고 더 나빠진 부분도 있다)    


TV에서 보는 게 어렵지 않은 논객 진중권


  폭력, 죽음, 자유, 공동체, 처벌, 성, 지식인, 공포, 정체성, 민족, 힘, 프렉털. 카테고리를 나누어 시대와 공간에 불화한 진보 지식인이 설파하는 비판과 주장은 수긍하고 안 하고를 떠나 독설에 가까운 어조가 일단 통쾌하다. 역사적 철학적 지식에 기반한 예시까지 꼼꼼히 들어가며 사이비 자유주의자들과 극우주의자들에 대해 반박하는 논리는 무척 상쾌하다. (한때 그의 별명이었던) '모두 까기 인형'답게 한국 사회에서 행해지는 각종 폭력에 대한 상스러움을 비꼬아 까대는 어조는 살짝 불편하면서도 웃음 짓게 한다. 그의 지식과 논리도 부럽지만 그 까대는 말투, 독설에 가까운 냉소와 조롱, 칼날같은 유머는 나의 취향 때문인지 몹시 끌린다. 진중권 특유의 '까댐'과 '조롱'은 책을 통해서만 감지할 수 있다. 그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자주 본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그가 방송에서 하는 멘트보다는 책에서 보여준 어조가 더 신랄하고 유머러스하고 출중하다고 생각한다.


폭력- 집단과 하나가 되는 한에서만 개체는 안전하다. 부조리한 실존들은 괴상한 집단주의 속에서만 구원을 찾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필사적으로 자기를 집단과 동일시하려 한다. 그 집단은 작게는 교실 안의 패거리, 크게는 국가와 민족일 수 있다. 집단과 동일시에 실패하는 자는 공동체의 성스러움을 지키기 위한 희생양이 된다. 그러다가 희생자가 사라지면? 문제없다. 개별자들은 집단 속에서 기어이 또 하나의 '모난' 놈을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유치원부터 시작되는 '왕따' 현상은 우리 사회의 게임 규칙이 얼마나 적자생존의 원시 시대를 닮았는지 보여주는 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사회의 어린이는 그 사회의 어른을 닮았다는 '무서운 사실'이다. 1930년대 독일에서 정치 현상으로 나타난 이지메는, 유대인이란 인간집단을 사회적으로 왕따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죽음- 종교와 예술은 '가상'을 만든다. 정상인은 가상과 현실의 차이를 안다. 하지만 정치가 예술이 되고, 예술이 유미주의가 되고, 유미주의가 미적 종교가 되고, 그 종교가 광신에 빠질 때, '가상'과 '현실'의 경계는 흐려지고 착란이 시작된다. 이 착란이 정치성을 띠는 곳에서, 정치와 종교와 예술이 만나는 그 '가상현실'의 교차로에서, '번쩍' 미시마의 니폰도는 섬광을 뿜는다. 오, 정치의 예술화, 국가의 종교화, 애국적 정사, 그 아름답고 숭고한 개죽음. 이게 우익적 '죽음'이다.


  70년대 군부독재를 하다 저격당해 죽은 대통령을 신격화하고 우상화해 오페라로 만들었다는 사실, 그 당시엔 왜 몰랐는지 모르겠는데 끔찍하다. 오페라의 유령은 좋지만 이 '오페라의 망령'은 제발 안 보고 싶다.


처벌- 지금 이 시간에도 초조하게 처형을 기다리는 영혼들이 있다. 정말로 죄의식을 느껴야 할 자들은 누구일까? 동료 인간을 죽여야만 유지되는 우리 사회의 이 잘난 질서. 그런데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 잔혹한 살인행위에 가담하면서도 이제는 죄의식마저 느끼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 사형제도가 존재하는 한, 우리 모두는 어떤 비열한 살인의 공범이다.


  이 책의 좋은 점은, 사형제도 같은 보편적이지만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이기 쉬운 문제에 대한 윤리적 가치를 환기시켜준다는 것이다. 이런 역할을 하는 저서가 이 책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공동체의 복수와 처벌의 논리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사형제도의 비윤리적인 측면과 불합리한 면을 환기하는 것은, 이 제도가 지구 상에서 사라지는 그날까지 멈춰서는 안 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성 - 동성애자 담론은 이제까지 주로 소수자의 인권 보호라는 측면에서만 이루어져 왔다. 즉 동성애자를 사회에 받아들여 달라고 청원하는 수준을 넘어, 이제 동성애자의 존재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논해야 할 것이다. 남자와 남자가 사랑을 나누는 동성애의 모델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와 소통 구조를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새로이 조직하는 데 필요한 영감의 원천이 될지도 모른다.


  16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글이 통용되는 범위와 인식이 확장됐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때 나온 주장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면(여전히 주장이 필요할 정도로 나아진 게 없다면) 우리의 성에 대한 인식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이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고 깊게 생각하며 산 것도 아니지만, 앞으로 16년 후에도 이런 글이 여전히 필요하다면, 우리의 성인식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공포 -레드 콤플렉스는 빨갱이에 대한 공포감이 아니다. 외려 빨갱이 잡는 극성스러운 반공 투사들에 대한 공포에 가깝다. 말하자면 언제라도 빨갱이로 몰려 죽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강박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반공주의적 언행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타인을 향해 "나는 빨갱이가 아니에요."라고 고백을 시끄럽게 하는 방식. 그것도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공격적인 방식의 고백. 그것이 레드 콤플렉스다. 


  어디 레드 콤플렉스뿐일까. 나와 다른 의견은 무차별적으로 공격과 지탄을 받는 사회에서는 제 목소리를 내는 게 목숨을 거는 것만큼 엄숙하다. 시도 때도 없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회에선 생존이 유일한 정의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정의를 위해서 우리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것이다.


정체성- 한국인의 정체성은 패거리의 정체성이다. '에고'는 있어도 '주체'는 없다. 그리하여 제 조그만 이익을 지키는 데에는 남에게 질세라 악착같이 달려들어도, 정작 자기의 견해를 얘기해보라고 하면 변변히 제 생각을 말로 풀어낼 줄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는 '집단'은 있어도 '사회성'은 없다.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다는 친절함은 정확하게 자기가 속하여 친분이 있는 집단의 동그라미에서 멈춘다.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당하든, 평균적인 한국인은 그들에게 아무 연대의식도 느끼지 못한다. 슬프지만 그게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 글을 읽고 찔리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찔리지만 아닌 척하는 건 그래도 인간적이다. 난 전혀 안 찔린다고 하는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누어질 것이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걸로 자족하는 한국인. 민족중흥은 개나 줘버리라며 평균을 벗어난 삶을 지향하는 한국인답지 않은 한국인.


민족- 민족주의는 낡은 이념이 되어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민족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통일의 과제가 남아 있고,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간섭의 문제가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한 민족이 문화적 정체성을 갖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몇 푼의 효율성 때문에 문화적 다양성을 지워버리는 것이야말로 인류 문화에 대한 테러다.


  16년 전과 지금의 극명한 차이는 중국의 부상으로 우리를 간섭하는 나라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이다. 대국답지 못한 (자칭) 대국의 치사한 복수와 참견은 정말 신물이 난다. 그때보다 문명이 더 발달했지만,  환경 위협을 비롯한 인류 공동체 정신이 절박한 상황에서 테러 위협 같은 범지구적 범죄 행위는 더 빈번하고 잔인해지고 있다. 예전에도 그다지 살기 좋은 세상은 아니었지만, 점점 나빠지는 세상에 살고 있는 현실에서 (드물게) 이 주제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10여 년의 간격을 두고 두 번 읽은 이 책은 재밌지만 어렵고, 통쾌하지만 찝찝하다. 작가는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에 실린 모든 글의 바탕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의 한 패러그래프가 깔려 있음을 눈치챌 사람이 얼마나 될까? 철학으로써 '고상하고 정신적인 것'을 하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든 것이 너무 '고상하고 정신적'이어서 역겨운 시대에 철학은 광대가 되어 지저분한 장바닥에서 질펀하게 쌈박질을 하며 노는 게 낫다. 가끔 글을 쓰면서 이성의 스위치를 내리고 머리를 스치는 헛소리들을 떠오르는 대로 받아 적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가 말한 비트겐슈타인을 읽은 적이 없으니 당연히 그가 깔아놓은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그게 뭔지도  모르겠다. 부끄럽기보다는 궁금증이 앞선다. 그가 곳곳에 갈겨놓은 조롱과 비아냥이 예사롭지 않은 형식일 거라는 예감이 맞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글 쓰는 스타일을 전혀 엉뚱하게 짚은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내 이해 밖의 무언가가 내포된 '다른 것'이 있는 것인가. 이 모든 무지가 답답하고 창피하지만,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어렴풋이나마 알았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이 시점에서 내가 비트겐슈타인을 찾아본다면 정말 나는,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할지 모른다. (평범한 호기심과 노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을 만큼) 엄청 무식하거나, 지적 능력은 좀 달리지만 유연한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거나.  


  유머를 날카롭게 구사하는 저자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진중권 론을 쓴 노혜경 시인은 '유머감각이란 자기 자신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지적 능력'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진중권이야말로 지적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다. 논리적인 주장과 합리적인 어조도 그를 지적으로 보이게 하지만, 깊고 솔직한 빡침과 유머러스한 조롱에는 따라가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그가 줄줄이 써대는 글이, 격앙돼서 하는 말보다 더 통쾌하고 시원하다. 그의 글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하지만, 그가 자신이 한 말과 신념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상식적인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다. 나 또한 상식적으로 살고 싶으니, 그를 더 많이 더 자주 접해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예전에 봤던 이 책을 다시 읽은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의 팬이 아니다. 그가 하는 트위터나 팟캐스트를 접한 적도 없고, 방송을 일부러 찾아보지도 않는다. 그냥 우연히 얻어걸리면 보고, 보다가 지루하면 돌리기도 한다. 그의 개인사엔 조금도 관심 없고, 오로지 그의 저작물에, 그가 쓴 글의 내용과 어조에 조금 관심이 있을 뿐이다. 관심이 있다고 다 찾아보는 것도 아니고, 찾아본들 다 이해하고 수긍하는 것도 아니다. 읽는 쾌감이 있고 재밌으니 책을 읽는 것뿐이다. 내가 진중권이라는 저자를, 이 시대의 인지도 있는 실천적 지식인을 소비하는 행위는 딱 거기까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아직 못 읽은 그의 저서는 많다. 읽을 때마다 그가 어떻게 변하는지, 또 어떻게 한결같은지 지켜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그는 나에게 매력적인 남자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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