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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Aug 12. 2018

신기하게 마음이 읽히네요..

책 <마음 사전> 김소연, 마음산책, 2012년

  이 책은 외롭다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 하룻밤을 꼬박 새워본 적이 있는 시인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마음 관련 낱말 하나하나에 밑줄 긋고 주석을 달아놓은 사전이다. 사전이라기보다 내밀한 단어장이다.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 지극히 주관적인 낱말의 해석은, 읽는 이도 미처 몰랐던 단어의 미세한 감성적 차이를 드러내며 공감하게 한다. 시인이 하는 일은 어찌나 섬세하면서도 과학적인지, 그녀의 작업이 과학이 아니라면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를 이렇게 정갈하게 분류하고 해부해서 펼쳐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6년 전에 읽은 책을 다시 꺼내보았다. 여전히 명료하고 신기하다. 마음의 갖가지 상태를 이렇게 세심하면서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게 가능하다니, 비록 나의 직관은 아니지만 책값만 내고 작가의 감성과 지혜를 나눠가지는 입장에서 감사하기까지 하다.  



* 당신을 착시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아름답다.

* 감정은 반응하며, 기분은 그 반응들을 결합하며, 느낌은 그 기분들을 부감한다.

* 소망은 지니고 태어나고, 희망은 살면서 지니게 된다.


  시인은 정의한다. '행복은 스며들지만, 기쁨은 달려든다.' 기쁨은 전염성이 강하지만, 행복은 전염되기 힘들다. 남의 기쁨에는 쉽게 동조되지만, 남의 행복에는 그렇지가 않다는 주관적 해석에 토를 달 법도 한데, 그럴 수가 없다. 맞다고 동조해서라기 보다, 시인이 그렇다니까 정말 그런 것 같다. 이 은근한 정의와 주장은 설득력을 넘어, 인간 내면의 심연을 엿본 사람만이 가진 혜안으로 느껴진다.  


  처참함은 너덜너덜해진 남루함이며, 처절함은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괴로움이며, 처연함은 그 두 가지를 받아들이고 승인했을 때의 상태다. 처참함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정황이라면, 처절함은 차마 손댈 수 없는 정황이며, 처연함은 눈 뜨고 볼 수도 있고, 손을 댈 수도 있지만, 눈길도 손길도 효력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는 상태다.


  내가 앞으로 쓰는 글에서 '처참함'과 '처절함'과 '처연함'을 미세하게 구분해서 쓴다면 이 책과 시인 덕분이다.


  슬픔은 모든 눈물의 속옷과도 같다. 무슨 연유로 울든 간에, 그 가장 안쪽에는 속옷과도 같은 슬픔이 배어 있다. 감격적인 순간에도 참회의 순간에도 환희의 순간에도, 우리는 알지 못할 슬픔에 둘러싸여서 눈물을 흘린다. 그럴 때의 슬픔은 정황에 대한 격리 때문에 찾아온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격리, 세상에 대한 소외, 자신의 생을 입체적으로 감지할 수 있게 하는 소격 효과가 일어날 때, 우리는 겹겹이 껴입은 옷들을 벗고 속옷 차림으로 세상에 놓이게 된다.


  툭하면 나오는 눈물을 이렇게 설명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맞다 틀리다를 떠나 슬픔이 눈물의 속옷이 되는 순간, 나의 슬픔은 유치하지 않고 나의 눈물은 더 이상 주책 맞지 않게 변한다.


  이 책의 압권은 뭐니 뭐니 해도 그녀가 사랑이란 발화에 달아놓은 해석이다.


  사랑의 시작을 여는 필수조건에는 '실수'가 있다. 그 실수를 우리는 '운명'이라고도 말하고, '필연'이라고도 말하지만,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실수일 뿐이다. 실수의 첫 발이 사랑을 점화시킨다. 그 실수는 이후, 가장 특별한 것, 가장 현명한 것, 가장 필연적인 것으로 미화된다. 미화하는 힘 자체가 사랑의 힘인 셈이다.


  이런 해석 앞에서는 반발할 논리도 의지도 사라진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쯤에선 뜨끔하며 괜히 멋쩍은 웃음이 나온다. 시인이야 말로 사람을 잘 이해하고 세상을 탁월하게 오해하는 사람이다.

  

* 자존심은 차곡차곡 받은 상처들을, 자존감은 차곡차곡 받은 애정들을 밑천으로 한다.

* 착함은 일상 속에서 구현되고, 선함은 인생 속에서 구현된다.

* 엄격하게 말해서, 세상 모든 사랑한다는 고백은 학살의 일부다.


  사랑한다는 고백이 학살의 일부가 아니라고 반발할 힘을 잃게 만드는 문장들은 책갈피를 조용히 채우지만, 고백 같은 파장은 읽는 이의 마음에 깊게 퍼진다. 이 책을 지은 시인은 마음 경영이 이번 생의 목표라 했는데, 10년 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으로 생의 목표를 어느 정도는 달성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나의 생의 목표는 내가 몰랐던 세상의 아름다움을 죽기 직전까지 알아가는 것인데, 완성이 없는 이 목표가 점점 힘들지만 살아갈수록 뿌듯하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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