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이스 Aug 09. 2018

처절한 정원

책 <EFFROYABLES JARDINS> by Michel Quint

  오래된 책장에서 발견한 책은 얇았다. 10여 년 전에 봤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아릿하게 읽었다는 느낌은 어렴풋이 드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생각나지 않는다. 다시 펼쳐보고 덮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맞다, 이 얘기다.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지면서도 시리다. 1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어릿광대의 회상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화장을 지우고 들어와 법정에서 재판을 지켜본 어릿광대의 감회로 끝난다.   


  1999년,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부역한 프랑스 비시 정권의 치안 부책임자였던 모리스 파퐁의 재판이 열린다. 그는 1590명의 유대인을 체포하여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 죽게 했는데 "공복으로서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한다. 한동안 비시 정권하에서 일했던 관리들의 수동적 행위를 단죄할 수 있는가 하는 논란이 야기되기도 했지만, 유대인의 강제 수용에 대해 프랑스는 국가적 책임을 처음으로 시인하고, 모리스 파퐁에 대한 응징을 시작했다.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 처벌에는 시효가 따로 없고, 예외가 없다는 것이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의 변치 않는 입장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어릿광대를 증오했다. 교사라는 본업이 있지만, 부르기만 하면 어릿광대 분장을 하고 어디든 달려가는 아버지가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가스똥 삼촌이 들려준 아버지가 어릿광대로 살 수밖에 없는 사연은 처절한 진실이자 비밀스러운 가족사가 되어 작가의 인생을 바꿔 놓는다.


  1942년 나치의 광기가 유럽을 뒤흔들던 시절, 레지스탕트로 활동하던 20대의 아버지와 삼촌은 역의 변압기를 폭파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밤, 역에서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나온 두 사람은 다음 날 독일군에게 체포된다. 당시 독일군이 테러 사건을 처리하는 수법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었다. 일단 인질을 잡아놓고, 사흘 안에 진범이 자수하지 않으면 인질을 대신 사살했다. 두 사람 외에 그들과 같은 축구회 회원인 앙리와 에밀도 인질로 잡혔다. 독일군은 변압기를 폭파한 진범을 잡아놓고도, 그들의 정체를 몰라 진범이 자수하기를 기다리며 숲 속의 구덩이에 인질로 잡은 네 사람을 넣고 누가 먼저 죽을지 택하라며 피를 말린다.


  무고한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가책 때문에 삼촌은 자수하려 하지만, 아버지는 어차피 넷 다 죽일 거라며 삼촌을 만류한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며 공포에 떠는 네 사람에게, 그들을 감시하는 보초병은 샌드위치로 저글링을 하며 익살을 떨다 던져준다. 곧 죽을 운명이라는 것도 잊고 보초병 덕에 웃은 네 사람은, 그의 엉뚱한 익살이 공포에 질린 인질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행한 인간적 행위라는 걸 나중에 깨닫는다. 구덩이에서 하룻밤을 보낸 네 사람은 다음날 테러범이 자수했다는 소식에 기적적으로 풀려난다. 진범을 놔두고 그들 대신 자수한 사람은 누구일까.    


  변압기를 폭파했다고 자수한 사람은 역의 전기공이다. 그는 아버지와 삼촌이 변압기를 폭파할 당시 역에서 몰래 지켜보다 크게 화상을 입었다. 그의 아내는 곧 죽을 남편의 목숨으로 레지스탕스들을 살리기로 결심하고 그가 한 짓이라고 고발한다. 그 역시 아내의 뜻을 받아들여 독일군 앞에서 자신의 짓이라고 자백한다. 그들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부부였다. 나중에 사연을 알게 된 아버지와 삼촌은 혼자 남은 부인을 찾아가고, 삼촌은 얼마 후 그녀와 결혼한다.


  아버지는 그때 숲 속 구덩이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자신들을 웃게 해 준 보초병 직업이 어릿광대라는 걸 알게 된 후, 빨간 머리 가발을 쓰고 평생 몸을 낮추며 살았다.


  지금은 아버지도 가스똥 삼촌도 숙모도 이 세상에 안 계신다. 작가는 아버지 대신 어릿광대 분장을 하고 전범 재판에 참석해, 그 시대를 살고 희생한 사람들을 기리며 역사의 증언과 단죄를 지켜보려 한다. 비록 광대 분장으로 입장은 못했지만, 그는 재판정에서 아버지의 광대 분장 도구가 든 가방을 안은 채 인류에 대한 책임, 인간의 존엄성, 도덕에 따른 행동이 어느 시대의 법률이나 명령보다 우선하다는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실화인지 허구인지 헛갈리는 이 이야기는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작가가 짧은 서사에 담아낸 처절한 진실과 절박한 희생으로 후세의 가슴을 후려친다. 전쟁의 고통을 안고 간 영혼들을 대신해 진행되는 전범 재판은, 빛나는 권위의 상징인 법정이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한을 풀어줄 것인지 보려는 인류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심판과 증언은 영원히 끝낼 수 없다는 그들의 입장에 반해, 우리가 겪은 일제 시대 친일 인사들의 반민족적 행위나 위안부 등 일본의 반인륜적 범죄는 단죄는커녕 사과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요즘의 사법 농단 사태를 보면, 일제시대 강제 징용 희생자들을 우리나라 사법부가 어떻게 다루고 처리하는지 그 기막힌 참상에 말문이 막힌다. 이제는 죽어 백골이 된 사람이 훨씬 많은 희생자의 명예 회복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단죄를 미뤄 시대의 희생자를 두 번 죽인 사법부의 반인륜적 행위는 대체 누가 언제 어떻게 심판해야 하는 건지, 앞이 까마득하다.  


  왜 우리는 '처절한 정원'을 가꿀 수 없는 것일까. 위안부와 강제 징용 희생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생존으로 증명하는데도 가해자의 반성과 사과조차 못 받았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심판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은폐하려 한다. 마지막 가해자와 피해자가 사라져도 진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의 현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고단하고 처절할 것이다.      


  전범 재판을 지켜본 어릿광대가 한 말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들어야 할 말이고, 해야 할 말이다.  


이 세상에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