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황인숙 시집 (1998)
폭염에 지쳐 비를 기다린다. 평소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실은 꽤 미워하고 돌아다니다 운동화가 젖으면 눈까지 흘기면서, 간사한 마음은 매미소리 쨍한 하늘만 쳐다본다. 물 한 방울 내릴 기미 없는 대기가 오늘도 후끈거린다.
심장에서 꺼낼 밤을 지닌 사람, 밤에 꺼낼 심장을 지닌 사람은 같은 듯 다른 사람이다. 더위는 심장도 제 속도를 못 내게 한다. 내 몸이 살겠다고 밤에도 퐁퐁 밀어내는 땀은 기특하기는커녕 울컥 짜증 나게 한다. 밤낮 이러면 어쩌라는 거냐고 퍼붓고 싶다. 별게 다 생존을 위협한다.
비가 온다고 말할 사람이 있는 시인은 행복한 사람이다. 말할 게 생겨서 기쁘고, 침울한 소중한 이가 거기 딱 기다리고 있다가 들어줄 테니 말이다. 체온이 저주인 이런 때에, 폭염 같은 거대한 적을 함께 무찌를 이 없다는 것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시인의 맹세는 단호하면서도 말랑말랑하다. 역경과 불운과 고통을 따뜻이 영접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래도 기어이 찾아와 꾸역꾸역 생을 밀고 들어온다면, 의연히 맞겠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자기 불행 앞에선 객관적이 될 수 없다.
황인숙 시인은 시어에 마침표와 쉼표와 느낌표와 인용부호까지 쓴다. 보통 시엔 문장 부호를 안 쓰던데(나의 선입견일 수도 있다) 이 시집에선 꼼꼼히 들어간 문장 부호가 눈에 띈다.
자기 부정과 염세적인 말들이 종종 보이는 이 시집은, 시인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 언저리에 쓴 시를 모아 놓은 것이다. 생의 기대감이 빠져나가고, 자조적으로 비관할 만한 나이다. 유쾌하고 명랑한 척 위선 떨지 않아서 좋다. 소중한 이 마저 침울하다고 하는 현실 감각이 반갑다. 담백한 비관과 투명한 고백은 오히려 위안을 준다. 인생이란 고단하지 않으면 구차한 것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의 마음은 그다지 구차하지 않을 듯싶다. 가난하다는 건 고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누추하지 않을 것이다. 시인이 저 시를 쓴 나이를 지나고 보니 저절로 알게 되는 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