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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30. 2018

웃지 못하는 한 사람, '웃는 남자'

책 <웃는 남자 L'HOMME QUI RIT> by VICTOR HUGO

  소설 『웃는 남자』 (1869)를 읽은 건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을 보기 위해서다. 굳이 원작을 안 봐도 상관없지만, 왠지 '웃는 남자'는 무대 위에서 그 기이한 얼굴을 대면하기 전에 글로 먼저 영접해야 할 것 같았다. 5월에 뮤지컬을 예매하고, 6월에 산 책을, 7월에 다 읽었다. 꽤 방대한 분량인데, 읽는 내내 대체 이걸 어찌 뮤지컬로 담을 수 있을까, 어느 부분을 얼만큼 생략하고 첨삭했을까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곧 궁금증이 풀리겠지만, 원작을 읽은 사람이 실망하고 짜증 나지 않게 뮤지컬 장르의 특성에 맞는 각색이 이루어졌길 바란다.


  이 소설의 배경은, 크롬웰 주도하에 이루어졌던 시민 혁명이 사그라들던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의 잉글랜드다. 처음엔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가 왜 영국을 배경으로 소설을 썼는지 의아했다. 프랑스는『레미제라블』이나 『노트르담 드 파리』같은 위대한 작품을 하나쯤 더 탄생시켜도 손색없는 작가의 고국이다. 17,18세기 유럽 여러 나라들은 서로 왕족끼리 혼인하여 인위적으로 동맹을 맺은 거대한 공동체라는 게 보편적인 상식이긴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엄연히 다른 나라고 언어도 다른데, 프랑스 작가가 영국을 배경으로 이런 대하소설을 썼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당시 유럽의 사회 정치에 대해 백지처럼 무지한 내가 이해하지 못한 그들만의 시대적 역사적 배경이 있다고 짐작할 뿐이다)  


프랑스 대 문호 '빅토르 위고'


  위고의 연보를 보니, 50세에 추방당해 18년 간 외국을 떠돌다 68세(1870년)에 파리로 돌아왔다는 걸 알 수 있다. 참고로, 이 작품은 그의 나이 66세에 탈고했다. 18년 동안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을 떠돌며 작가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들끊었을 상념과 소명은 나라와 배경을 초월한 범유럽적인 작품을 집필하게 했을 거라 짐작된다. 그가 생존했던 19세기와 이 작품의 배경인 17세기 유럽은 다르겠지만,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라는 주인공 그윈플레인의 입을 빌어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는 시대를 초월한 진리라는 생각이 든다.


  17세기 유럽엔 어린아이를 잡아서 귀족들 노리개로 팔아넘기는 인신매매단 콤프라치코스가 성행했다. 그들은 아이 얼굴을 기형적으로 변형시키는 끔찍한 짓을 자행한다. 눈보라 치는 어느 날 콤프라치코스에게 버림받은 아이 그윈플레인('하얀 평원'이란 뜻)은 죽은 엄마 젖가슴을 빨고 있는 눈먼 여자 아기 데아를 발견하고 품에 안는다. 그들을 거둔 건 떠돌이 약장수 우르수스('곰'이란 뜻)와 호모('인간'이란 뜻)라는 늑대다. 가난하고 멸시받는 이가 비참하게 버림받은 두 아이를 기르게 된 것이다.   


  15년이 흘러 그윈플레인은 25세 청년으로, 데아는 16세 처녀로 자란다. 인간을 혐오하는 철학자인 장돌뱅이 우르수스는 그윈플레인의 기괴한 얼굴을 모티브 삼아 세태를 비판하는 간이 연극「정복된 카오스」를 만들어 서민들의 인기를 독차지한다. 주인공 그윈플레인은 유명해지고, 앤 여왕의 이복동생 조시언까지 소문을 듣고 찾아온다. 귀족 생활에 따분함을 느끼고 자극을 원하던 조시언은 기괴한 그윈플레인의 얼굴에 반해 유혹을 손길을 뻗친다.   


  당시 잉글랜드는 신분 차별과 빈부 격차가 극심했다. 피어(귀족)와 서민의 삶은 극과 극 정도가 아니라 천상과 지옥만큼 같은 시대 다른 세상이다. 끔찍한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정의로운 영혼을 지닌 그윈플레인과 앞이 안 보이지만 순수하고 맑은 데아('신'이라는 뜻)는 서로를 아끼고 보듬는다. 그들은 우르수스와 함께하며 정의와 인간성이 무너진 세태를 비판하고 인간 존엄성을 얘기하지만, 무지막지한 귀족들과 불합리한 시대는 그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눈보라만큼 가혹한 운명은 고달프고 불우한 그윈플레인의 생을 또 한 번 뒤집는다. 그가 아기 때 콤프라치코스 하드콰논에게 납치당한 귀족의 적자라는 게 밝혀진다. 그윈플레인이 장돌뱅이에서 하루아침에 잉글랜드 피어 클랜 찰리경이 되고 겪는 일은, 생을 전복시킬 만큼 위험하고 아슬아슬하게 전개된다. 그윈플레인은 귀족들의 모임인 상원 의회에서 하층민으로 살며 겪었던 부당함과 비참한 세상의 실상을 토로하지만 귀족들의 비웃음과 멸시만 받는다. 그는 세상을 얻었지만 모든 걸 잃었다는 걸 깨닫고, 귀족의 지위를 버린 채 영혼의 단짝 데아에게 달려간다. 


  작가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떠돌이 철학자 우르수스는 '호모(인간)'라 이름 붙여준 늑대에게 '인간으로 퇴화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인간 사회의 부조리와 신분제의 비합리성, 왕족과 귀족들이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해 벌이는 비인간적인 행태는 (작가의 영혼을 대변하는) 우르수스가 인간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18,19세기 유럽은 길고 참혹한 전쟁과 대혁명의 시대였다. 왕정으로의 회귀와 다시 시작된 시민 혁명으로 서민들의 생활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스산했다. 어딜 봐도 비참하고 가엾은 사람들뿐인 사회에서 영원히 웃을 수 없는 남자에게 '웃는 남자'라고 명명한 건 작가의 씁쓸한 냉소일 것이다.


   위고가 '『웃는 남자』보다 더 나은 작품은 아직 쓰지 못했다'라고 말한 의미를 희미하게나마 알 것 같다. 기괴한 운명을 얼굴에 새긴 한 남자의 짧고 비극적인 삶은 그 시대 그 사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150년 전에 지어진 그 이전 시대의 이야기가 영화와 뮤지컬로 재탄생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이 작품이 우리에게 호소하는 감정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읽어버린 소설을 앞에 두고 보니 걱정된다. 뮤지컬이 흥미 위주의 볼거리와 무대 장치로만 현혹하는 게 아닌지, 소설이 주는 비극적 정서와 깊은 울림을 사그라들게 하는 건 아닌지 염려된다. 제발 아니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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