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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아나 May 03. 2022

글 공개는 공개 처형이다

자기검열의 삶



글을 공개하는 것은 나를 십자가에 매다는 일이다. 예수님과 같이 자신이 모든 죄를 지고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을 한다는 자만의 말이 아니라 언어 그대로 범죄를 저지 이들이 벌을 받기 위해 매달리는 십자가 말이다.


글 공개는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만 천하에 알리는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던가, 인문학이나 심리학이나 철학 쪽으로 일자무식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모든 소재가 ‘나’와 ‘너’ 여야 한다.


혼자만 볼 일기를 쓸 때에는 내가 가진 문제가 나의 문제이건 너의 문제이건 간에 원하는 대로 결정하면 된다. 그러나 글을 공개하려면 한참을 멈춰서 써 내려간 장면들을 되짚어가며 이것이 정말 너의 잘못이었는지, 나의 잘못이었는지 아니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서로 다르기 때문이었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내가 글을 공개하는 플랫폼들은 독자가 어떤 사람일지 전혀 알지 못하는 불특정 다수로, 당신이 내가 될 수도 있고 그가 될 수도 있다.


나에게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고 현재를 고민하면서 자기 객관화를 하는 시간은, 내가 글을 공개하기로 했거나 혼자만 간직하려고 했거나 매한가지였다. 글을 공개하기로 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의 한때가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 영원히 그 한 장면 속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기에 한순간의 선택과 실수가 나의 전부로 영원히 기억되는 것. 그것이 두려웠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막고 싶었다. 참, 피곤하게 살면서


자기 객관화는 제 몸집의 배가 넘는 십자가를 지고 사는 일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나의 것이고 자신의 내면이 전부인 것이 인간이기에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던 개인의 자유다.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고 정해진 세상 안에서 물리적 육체로 살아가는 보통의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생각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내면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없고 끊임없이 나를 의심하고 매 생각을 의심한다. 조금 편해지고 싶었다. 이만하면 내가 좋은 사람이지 않을까, 이만하면 그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살지는 않는 사람이 아닐까. 하면서.


나는 어떤 사람에게도 상처 주며 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준 상처는 분명 개인을 넘어 사회로 퍼졌다.


한순간의 앞뒤 잘린 말로 이미지가 고착되는 것을 모든 이들로 하여금 막을 수는 없지만 내가 고착시킨 이미지가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오해가 되기를 바란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을 붙잡아서 이유를 찾고 나열하는 나의 ‘느낌 구체화’는 꽤나 괴로운 일이다. 잊고 싶어서 꽁꽁 숨겨놓아서 먼지 쌓이고 케케묵은 기억들을 헤집으며 다시금 그 고통 속을 경험하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그래서 심리상담을 받는 일이 그토록 힘겨웠다.


십자가에 매달린 나를 보며 누군가는 위로를 받거나 누구는 반면교사 삼기를 바라고 있다. 나의 고통이  그저 나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스스로를 십자가에 메달고 십자가를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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