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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아나 May 07. 2022

씹히는 글

침대와 글쓰기


글을 읽을 때 눈이 글을 씹는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고 씹지 못하고 흘기며 튕겨져 나간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때 뇌에서 글을 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궁금해졌다. 원인은 전두엽에 있었다. 전두엽이 고등 인지지능과 집행 통제 기능을 담당하여 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관여한다고 한다. 독서가들은 추론 상위 인지과정과 관련된 전(前)전두엽의 특정 부분을 잘 활성화시키며 글에 이해도를 높이고 세부적인 내용까지 잘 기억한다. 사전 지식과 글의 지식의 관계를 유추하는 과정이 능숙한 독서가들에게 잘 이루어졌고 그에 필요한 뇌의 부위가 선택적으로 잘 활성화 된다고 한다. (방송사 EBS ‘당신의 문해력’ 내용 발췌) 나는 이 부분에서 글이 눈에서 씹힌다고 느낀 것 같다.


그렇다면 못 씹는 글은 나의 문해력의 문제인가 글을 씹지 못하게 만든 글의 문제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빠르게 내려졌다. 내가 글을 씹지 못하는 것은 내 문해력의 문제이고 내 글을 누군가 씹지 못한다면 내 글이 못 쓴 글이기 때문이다.

이 결론에는 마땅한 근거가 있다. 나는 책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할 뿐 잘 읽지는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글을 잘 쓴다는 지인들의 칭찬이 진실인지 의아했다. 책을 많이 읽어야 글을 잘 쓸 수 있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잘 쓴 글처럼 보이는 원인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내가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휘력이 부진해서 어려운 말을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어렵게 쓸 수 있는데 쉽게 풀어서 쓰는 것과 어렵게 쓰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쓰는 것은 매우 큰 차이라는 생각에 매우 부끄러워졌고 쉽게 쓰는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글쓰기는 내 삶에서 오는 흩어진 느낌들을 구체화시킬 뿐 만 아니라 가치관을 정리할 수 있게 해 주었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조금은 명확해져 가도록 돕는 수단이 되고 있다. 더군다나 입사하기 위해서 자기소개를 썼던 것이 내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사실, 자기소개는 앞으로도 어려울 예정이다.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어떤 부분을 알고자 하는지 간파하는 것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또한 글쓰기는 자신의 한계와 문제점을 찾아내고 미약하게나마 제삼자의 입장에서 판단할 수 있게 해주며 스스로의 한계를 스스로가 정하여 나아가지 못하는 비극을 방지해 준다. 개인적으로, 그리기와 글쓰기의 같은 점은 작업을 중단하고 잠시 쉰 이후에 작업물을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며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난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평생 철학과 문학이나 각종 전문분야들을 공부해온 지성인들은 생각을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삶의 범위를 확장하고, 눈뜰 때마다 급변하는 빠른 현대사회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지식을 수집하고 싶다는 욕구가 배움에 대한 동기가 되고있다. 글을 쓰게 된 이후로는 책을 모으기만 하지 않고 곧잘 읽기도 하게 되었다. 마음이 동하지 않고,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론이 없다면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고집쟁이가 필요하여 원하게 되니 드디어 읽게 되었다.




태안 여행 중



초등학교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기를 왜 써야 하는지 스스로 고찰했다면 조금 더 글쓰기의 중요성을 빨리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만 손글씨로 일기를 쓰는 건 손이 너무 아픈걸. 게다가 악필이어서 아름답지 못한 내 글씨를 내가 보고 있자니 기분도 좋지 않은걸.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글씨를 쓸 필요도 없고 휴대폰으로 침대에 누워서 글을 쓸 수 있지 않은가! 이 얼마나 엄청난 혁신인가! 역시 기술의 발전과 문명이 좋다. 그때에도 이렇게 일기를 쓸 수 있었다면 날씨와 일과를 지어내며 되지도 않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텐데. 하면서 오늘도 과거를 합리화하고 미래를 도모한다.

꾸준히 쓴다면 아마 내가 50대 즈음 되었을 때 지금을 회상하며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내 인생에서 손에 꼽힐만한 터닝 포인트였다고 글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우습게도 그때 결심한 대로 글을 꾸준히 써올걸, 하면서 또 후회하고 있을지도. 아무래도 이 미래는 오게 하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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