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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희 Dec 03. 2023

슬픈 눈의 '쿠날라' 왕자 이야기

간다라 이야기 #1

고대도시 시르캅(Sirkap) 전체를 전망할 수 있는 언덕 위에 오래된 스투파가 놓여있다. 얼핏 보아서는 돌무더기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정교히 쌓아 올린 뛰어난 고대 석조기술의 흔적에 보통 유적이 아닐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 유적 '쿠날라 스투파(Kunala Stupa)'라고 한다. 고대 마우리아 제국의 비운의 왕자 '쿠날라' 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고대도시 시르캅(사진 상단)을 내려다보고 있는 쿠날라 스투파(우)와 승원(좌)



쿠날라 왕자 이야기


쿠날라는 마우리아 제국의 전성기를 연 아소카 왕이 사랑했던 아들이다. 쿠날라 왕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아소카 왕에게는 사랑스러운 왕자가 있었다. 왕자는 특히 아름다운 눈을 타고났기에, 히말라야 산에 사는 눈이 아름다운 새 '쿠날'에서 이름을 따서 지었다. 왕자는 출중한 능력뿐 아니라 훌륭한 품성을 갖췄다. 쿠날라는 성장하면서 다음 왕위를 이을 준비된 왕자로 커갔다. 왕국의 사람들은 모두가 다음 왕위에 쿠날라 왕자가 오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아소카 왕이 통치 말년에 티샤라크샤(Tishyaraksha)를 마지막 아내로 맞이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티샤라크샤는 하녀 출신이지만 뛰어난 미모와 매력적인 춤실력으로 아소카왕을 매료시켜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늙은 아소카에게 만족할 수 없었던지, 아소카의 아들 중 외모가 출중했던 쿠날라 왕자에게 마음을 품었다. 티샤라크샤는 쿠날라 왕자를 유혹했다. 하지만 올곧은 품성을 지녔던 쿠날라는 이를 거절하였다. 또한 쿠날라는 티샤라크샤를 가엽게 여겨 이를 없었던 일로 하였다.

티샤라크샤는 자신의 행동이 화가 될 것이라 생각하여 불안한 나날을 보내었다. 그러던 중 쿠날라 왕자는 탁실라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왕궁을 떠나게 되었다. 티샤라크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거짓된 왕명을 담은 칙서를 보냈다. 그녀가 조작한 왕명은 바로 쿠날라 왕자 본인의 눈을 파내고 왕국 밖으로 쫓겨낸다는 것이었다. 쿠날라는 아버지의 인장이 찍힌 편지이기에 의심하지 않았고, 바로 불에 달군 쇠를 준비하여 스스로의 눈을 해했다. 맹인이 된 쿠날라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길을 떠났다.

눈을 잃은 쿠날라는 어려서부터 잘 다루었던 류트를 켜며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다. 슬픈 곡조의 류트 연주는 금방 왕국 내에서 유명해졌다. 결국 그는 아소카 왕의 앞에서 연주를 하게 되었다. 왕은 쿠날라의 연주를 듣고 바로 눈앞의 맹인이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차렸다.

왕의 명령으로 티샤라크샤의 음모는 낯낯이 밝혀졌다. 처형이 명해지자 티샤라크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한 번 상한 왕자의 눈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에 아소카왕은 불교에 도움을 요청했다. 탁실라의 천 명의 승려들은 눈물을 모았다. 한 바가지가 모인 승려들의 눈물로 왕자의 눈을 씻자 왕자는 시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거의 다 허물어진 쿠날라 스투파



쿠날라 스투파


사실 지금의 쿠날라 스투파와 쿠날라 왕자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쿠날라 왕자는 기원전 3세기에 태어난 마우리아 제국의 왕자인데, 스투파는 쿠샨시대에 만들어진 적어도 4~5백년의 차이가 있다. 아마도 훗날 탁실라의 사람들이 슬픈 쿠날라 왕자를 기리기 위해서 스투파를 건립했거나, 혹은 기존의 스투파에 그 이름을 붙였지 않났나 싶다.


쿠날라 왕자 이야기는 탁실라 사람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었던 듯하다. 7세기, 간다라를 방문한 중국인 승려 현장법사도 쿠날라 이야기를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현장법사가 간다라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에프탈의 침공으로 대부분의 불교 유산들이 파괴되고 난 뒤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자세하게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탁실라를 잠시 통치했던 매력적이지만 슬픈 쿠날라 왕자가 특별했기 때문일 것이다.


쿠날라 왕자 이야기는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모로 각색되고 다른 이야기들이 덧붙여졌다. 지금은 다양한 버전의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는데, 쿠날라 왕자가 눈을 되찾게 되는 부분을 담고 있는 버전이 흥미롭다. 아마도 권성징악을 바라는 사람들이 눈을 잃은 쿠날라 왕자를 맹인으로 두고 이야기를 차마 맺을 수 없었나 보다.


현장 법사 대당서역기에 많은 맹인들이 이 스투파에 찾아와서 기도를 하고 눈을 뜨는 일들이 많았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래서인지 지금에도 눈이 안좋은 사람들이 쿠날라 스투파를 꼭 순례한다고 한다. 눈의 치료에 대한 진위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아무래도 시야를 잃고 좌절했을 쿠날라 왕자 이야기가 눈이 안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좌) 초목에 뒤덮인 쿠날라 스투파, (우) 긴 세월이 흘렀지만 뛰어난 고대 석조 기술의 흔적은 스투파의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참고자료

쿠날라 왕자 이야기는 대당서역기 그리고 현장을 안내해준 마뭇 울 하산 교수님의 이야기를 조합하여 작성했다.

현장 / 권덕주 번역, 대당서역기, 올재, 2012

Marshall John, Taxila an illustrated account of archaeological excavations, Cambridge, 1951

https://discoveringpakistan.wordpress.com/2013/04/16/the-legend-of-prince-kuna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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