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다라' 하면 특유의 불교 예술이 떠오른다. 서양 미술과 결합된 불교 조각은간다라의 상징과도 같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1~5세기, 쿠샨왕조 시기에 국한된 것으로 간다라를 좁게 보는 것이다. 실제 간다라 문화의 역사는 이르게는 기원전 6세기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부터 늦게는 기원 후 10세기의 힌두 샤히 왕조까지, 거의 천 오백 년의 시기를 거쳐간 아홉 왕조를 아울러 볼 수도 있다. 즉, 간다라에는 다양한 왕조에 종교와 문화가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간다라의 고대 왕국들
천년의 간다라를 일통 하는 '돌 쌓기' 기술
이런 다양함 속에서 간다라의 전 시기를 아우를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간다라식 돌 쌓기'이다.
(좌) 바다푸르 유적의 석벽에 사용된 간다라식 돌 쌓기 기술, (우) 바말라 스투파에 적용된 정교한 돌 쌓기
간다라식 돌 쌓기의 특징은 큰 돌들을 횡으로 길게 배열하고, 큰 돌 사이에 작은 돌들을 끼워 넣어 고정시키는 조적 방식이다.표면에 노출되는 방향에 큰 석재의 편평한 면이 위치하도록 설치하는데, 표면 쪽에만면 다듬기가 이루어진다.조적체의 안정을 위한 접착제는 따로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흥미로운 점은 간다라 지역에 있는 조로아스터교 사원에서도, 자이나교 스투파에서도, 불교 승원에서도, 왕궁 유적에서도, 심지어 고대 주거지 유구에서도 간다라식 돌 쌓기 기술이 동일하게 사용된 점이다.
돌을 쌓아 만든 간다라의 문화유산들 (좌) 모라모라두 유적, (우) 자울리안 유적
(좌) 조로아스터교 잔디알 사원의 돌 쌓기 기술, (우) 고대도시 시르캅 성벽에 사용된 돌 쌓기 기술
수 세기에 걸쳐 발전하는 돌 쌓기 기술
간다라의 석공들은 수세기에 걸쳐 같은 방식의 돌 쌓기를 고수하였다.장인들은 전통을 고수하고자 하였지만 오랜 돌 쌓기 과정에서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아주 작고, 느린 변화였지만 수세기에 걸쳐 누적된 변화였기에 전체를 아울러서 보면 시대에 따른 기술의 변화로드러나며, 이를 시기별 양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돌 쌓기 기술은 특히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의 기간 동안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기원전 2세기 이전에는 조적 기술이 다소 조잡하였는데, 횡으로 배열한 큰 석재도 균일하지 않았다. 또한 틈을 메우는 데 사용된 돌도 크기가 커 여전히 틈이 많이 남아있다. 1~2세기에 이르면 큰 석재들의 배열이 나란해지고, 틈을 메우는 돌의 크기가 다소 작아진다. 2~3세기가 되면 명확한 변화가 생긴다. 틈을 메우는 석재가 벽돌과 같이 납작해진다. 3세기가 되면 틈을 메우는 석재가 매우 조밀하게 가공되어 석재간의 공극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간다라식 돌쌓기 기술은 점차 조밀하고 튼튼한 구조로 발전했다.
(좌) 시르캅 유적의 외벽, (우) 탁실라 박물관에 전시된 조적 기술의 변화 모형, 위쪽으로 갈 수록 조적기술의 발전이 눈에 띈다.
이러한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례가 있다. 고대도시 시르캅의 성벽은 기원전 2세기에 쌓기 시작해서 기원후 1세기까지 이어졌다. 변화의 양상이 뚜렷했던 300년 간의 기술변화가 하나의 성벽에 모두 담겨있어, 기술변화를 이해하기 좋다. 한편, 탁실라 박물관에는 돌 쌓기 기술의 변화를 명확하게 볼 수 있는 모형을 만들어 두었는데 간다라의 조적 기술 변화를 이해하는 데에 참고할 만하다.
돌 쌓기 기술을 염두에 두고 유적을 살펴보자
돌 쌓기 기술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간다라 유적들을 살펴보면 유적들이 조금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단일 유적 내에서도 먼저 만들어진 부분과 나중에 추가된 부분의 차이가 눈에 띈다.
다르마라지카 유적, 위치에 따라 사용된 조적 기술의 차이가 확인된다. 스투파의 조적 기술, 기단과 내부의 돌 쌓기 기술에서 명확한 차이가 확인된다.
또한 수리된 부분에 대해서도 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간혹 무너진 석축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곳에서 간다라의 고대 석축기술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유적을 살펴보다 보면 어느새 간다라 돌 쌓기의 매력에 빠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석축의 연결부 흔적을 통해서 개축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좌) 피플란 유적, (우) @ 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