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커닝엄(Alexander Cunningham, 1814-1893)'은 인도에 고고학을 가져온 사람이라 불린다. 그는 공병 장교로 입대하여 28년간 복무하며 소장(Major General)까지 오른 군인이었다. 하지만 남아시아의 문화유산에 매료되어잘 나가던 군대에서 스스로 전역을 신청하였다. 그리고 인도 전역을 헤집고 다니면서, 문화유산들을 조사하고 탐구하며 새로운 역사를 밝혀냈다. 이 영국인은 어떤 배경이 있었길래 이런 파란만장한인생을 살 수 있었는지 궁금증이 생긴다. 이번 글에서는 알렉산더 커닝엄의 일대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알렉산더 커닝엄(Alexander Cunningham, 1814-1893)
알렉산더 커닝엄은 1814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이 시기의 영국은 산업혁명과 식민지 확장으로 최고의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고, 런던은 그 중심지였다. 그의 아버지 알렌 커닝엄은 스코틀랜드계 이주 노동자였으나, 점차 시인으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아 알렉산더가 성장할 때는 이미 런던에서 유명세를 얻고 있었다. 덕분에 알렉산더를 포함한 6남매는 런던에서 우수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알렉산더 커닝엄은 동인도회사의애디스컴 군사 신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아 동인도회사의 생도 자격을 얻었다.
알렉산더의 다른 형제들도 인문학적 자질이 뛰어났다. 그의 형 조셉 데이비 커닝엄은 인도 벵골지역에서 군인으로 경력을 시작해 '시크교의 역사(1849)'를 집필하고 펀잡대학교에서 활동했다. 동생 피터 니콜라스 커닝엄은 작가로 활동하며 '런던 핸드북(1849)'을 출간했다. 또 다른 동생 프렌시스 커닝엄도 인도 마드라스 지역에서 군인으로서 활약하며 문학적 역량을 펼쳤다.
알렉산더 커닝엄의 성장 환경과 가족 관계는 군인과 고고학자로서의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좌) 알렉산더 커닝엄의 아버지 알렌 커닝엄(1784-1842), (우) 애디스컴 군사 신학교(1859)
왕립공병대에서 기술 교육을 받은 알렉산더는 1833년 19살의 나이로 동인도회사 소속 공병장교로인도로 파병되었다. 소위로 임관하여 영국 식민지의 안정적 지배와 확장을 위해 인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엔지니어로서 다리 건설과 도로 정비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1844-1845년에는 가와리오의 모럴강에 아치형 다리를, 1845-1846년에는 펀잡지방 비아스강에 배다리를 설치했다. 또한 1846-1847년에는 제1차 영국-시크전쟁 이 끝난 후 라다크와 티베트의 국경을 정하는 업무를 맡았다. 1848-1849년에는 칠리안왈라 전투와 구자라트 전투에 참전했고, 1856-1857년에는 버마 지역 수석엔지니어로, 1858-1860년에는 북서부 지역 수석엔지니어로 활약했다. 1861년에는 소장의 직위에 올랐다.
(좌) Battle of ferozeshah(제 1차 영국-시크 전쟁) ⓒ Public Domain, (우) 19세기 인도 제국 행정지도(1871) ⓒ Alexander Cunni
알렉산더 커닝엄은 군인으로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전업 고고학자 이상의 고고학 분야에서의 성과를 보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인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인도 파견 이후에도문화유산과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살았다. 특히 인도에 건너온 이후유사한 흥미를 가진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영향을 크게 받았다. 대표적으로 브라흐미 문자를 해독한 제임스 프린셉(James Prinsep)이나 용병 군인으로서 활약하며 고고학 조사를 병행했던 이탈리아인 장 바스티스 벤투라(Jean-Baptiste Ventura)와 교류가 있었다. 또한 군인이라는 직업은 인도 각지를 다니며 고고학적 조사를 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에 고고학과 관련된 일을 놓지 않고 지속할 수 있었다.
알렉산더가 군에 복무하는 동안(1833-1861)이룬 인문학적 성과는 고고학, 지리학,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지만, 특히 고고학에서 두드러졌다. 인도에 부임한 다음 해인 1834년, 간다라의 만끼알라(Mankiala) 스투파에 대한 글을 학회지에 실었다. 1837년에는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후 처음 설법을 했다는 사르나트에서 발굴을 했고, 1842년에는 부처가 도솔천에서 설법을 하고 다시 내려왔다는 상카샤(Sankassa)를 발굴했다. 1851년에는 산치(Sanchi) 스투파를 발굴했고, 그 후로 삿다라(Satdhara), 무렐쿠르드(Murel Kurd), 소나리(Sonari), 안데르(Andher) 주변 지역의 스투파를 발굴했다. 이러한 불교 유산에 대한 조사 결과를 정리하여 1854년에 'The Bhilsa Topes'를 출판했다.
알렉산더 커닝엄의 저서 'The Bhilsa Topes(1854)'의 삽화 산치 스투파
1861년, 알렉산더 커닝엄은 인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28년간 복무하며 소장의 위치에까지 오른 군 생활을 스스로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고고학자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 47살의 나이였다.
그는 신설된 인도 고고학 조사국(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의 초대 국장이 되었다. 사실 1848년에 이미 고고학 조사를 위한 정부 기구 설립의 필요성을 제기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1857년 세포이 항쟁을 통해 1858년 인도제국이라는 영국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면서 고고학 조사 기구 설립이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알렉산더 커닝엄의 인생도 전환기를 맞이한 것이다.
비록 정부의 고고학 조사 기구 국장이 되었지만,충분하지 않은 예산 배정으로 고고학 조사는 순전히 알렉산더의 개인적 열정에 의해 이어졌다. 그는 중국인 구법승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기록된 동선을 따라 고대 도시와 유적지를 조사하며 여러 가지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바로잡았다. 대표적으로 탁실라(taxila)의 위치를 바로잡은 것 등이 있다. 하지만 1864년 영국 정부의 지원 중단으로 ASI의 공식 업무는 중단되었다.
1871년, 인도제국의 총독이 바뀌면서 ASI의 업무는 재개되었다. 예산이 증가하고 전문가들도 배정되었다. 재개된 ASI의 업무는 인도제국 전역에 있는 모든 형태의 문화유산을 목록화하는 작업이었다. 알렉산더는 순차적으로 전국을 돌며 유적지를 측량하고 지도에 기록하는 등 문화유산 목록을 작성했다. 이 시기의 성과는 아쇼카 칙령이 포함된 'the first volume of Corpus Inscriptionum Indicarum (1877)'를 비롯하여, 'The Stupa of Bharhut (1879)', 'the Book of Indian Eras (1883)' 등의 책으로 발표되었다.
the first volume of Corpus Inscriptionum Indicarum(1877)에 담긴 아소카 석주와 비문
1885년, 알렉산더는 인도 고고학 조사국에서 은퇴한 후 영국으로 귀국했고, 1893년 런던에서 사망했다. 그는 남아시아 고고학에 큰 업적을 남겼다. 물론 전문성의 부족과 처음 해보는 시도였기에 여러 가지 실수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하라파가 불교와 관련된 유적일 것이라는 생각에 잡혀 인더스 문명이 세상에 알려지는 데에 시간이 걸리게 된 점이 있다. 조사기록의 방법 등도 현대 고고학에 비해 아마추어적인 부분이 있었다. 이러한 실수가 있었음에도, 그가 문화유산에 대한 열정과 헌신으로 남아시아 고고학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라는 점에는 반론이 없다. 특히 그가 설립한 인도 고고학 조사국은 훗날 남아시아 고고학의 중추적인 기관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비록 아마추어 고고학에서 시작하였지만, 그가 보인 열정과 성과, 모든 점에서 그는 남아시아 고고학사에서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참고자료
Alexander Cunningham, "The ancient geography of India", Trübner & Co., 1871
Rashid Manzoor Bhat, 'Reconstructing Indian History: Alexander Cunningham's Role in Shaping Historiography', "History Research", Vol. 11, No. 2, 2023, pp. 38-43
'Alexander Cunningham', "Veethi the face of india(internet site)", 2017.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