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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록 Dec 12. 2020

나의 사랑스러운, '한계'

비트겐슈타인과 에밀 시오랑의 잠언

오래전 이런저런 독서 리스트를 꾸리다 우연찮게 ‘논리-철학논고’라는 책을 읽게 됐다. 과연 제목만큼 무지막지한 내용이었고, 내 독해력으로는 단 한쪽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책을 읽는다기보다 그저 인쇄된 문자와 기호들을 뇌까리는 수준이었다. 반은 대충 훑고 반은 졸면서 어찌어찌 끝까지 도착했는데, 책의 마지막 줄은 이랬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위키백과)


이런, 이렇게 통쾌한 서술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여전히 책의 중심 내용은 머리에 남아 있지 않았고 사고의 흐름이 어떻게 저 명제로 귀결되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와 상관없이 마지막은 정말, ‘죽이는’ 문장이었다. 어디서건 이런 단언적인 문장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나의 부피를 정확히 설정해주는 인증처럼 느껴졌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니.


으레 인간에게는 한계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여겼다. 괜히 지레 겁먹고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스스로 제한하지 말자고 말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자기계발적 사고방식이다 - 이후 글쓴이가 다시 생성한 주석.)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마 좌절이나 무기력 같은 증상들에 허우적대다 무심해지기를 반복하던 때였을 것이다. 대체 한계가 없다니, 너무 아득해 보였다. 이정표 없는 사막에 툭 떨어진 것처럼. 그런데 저 문장이 저렇게 말하는 순간 오히려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알지 못하는 건 억지로 말하거나 생각할 필요 없으니 할 수 있는 것만 해, 하고 다그치는 것 같았다. 경계 밖의 것들을 가지치기하면서 안에서 어루만질 수 있는 것을 찾도록 도와주었다고 할까. 한계라는 단어가 이토록 긍정적일 수 있다니. 덕분에 나는 당시 내내 저 문장의 유령에 시달려야 했다.



에밀 시오랑 (왼쪽)




우유부단하다는 것은 정직하다는 표시이고, 무언가에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사기의 표시이다. 그가 내세웠던 확실한 주장이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사상가의 불성실 정도를 헤아려볼 수 있다.


_ 에밀 시오랑, <독설의 팡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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