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신발이잖아
남편은 사법시험 공부를 포기하고 창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난 속으로, 그냥 취직이나 하지, 생각만 하고 뱉어내지 못했다.
남편은 상대가 하는 얘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데 특별한 재능이 있고 상대의 의견에 1도 영향받지 않는 삶을 사는 걸 모토로 하기 때문에(실제로는 엄청난 영향을 받는 성격) 내가 하는 말이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이 뻔해서 괜히 쿨한 척,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던져본다.
지금부터 찾아보면 되지, 나의 쿨함을 뛰어넘어 막무가내 정신으로 무장한 남편의 당당함에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창업을 말리기 위해서 남편의 의지를 꺾을 뭔가 다른 전략을 써야겠다고 판단했다. 지지하는 척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면서 남편의 창업 아이디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투로 객관적인 평가를 하는 양 은근히 압박을 해보는 것이 낫겠다는 전략을 세웠다.(지금 돌이켜보니 애초에 전략이라 부를 수 없는 접근이었다)
지금부터 찾아보겠다는 건 뭐 특별한 아이디어도 없이 덤비겠다는 거네, 내가 슬쩍 자손심을 건드리며 창업이라는 벽을 가볍게 넘어가 보려 하니, 원래 창업이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거고 성공한 사람들(도대체 누구?) 모두 자기 방이나 자기 집 창고에서(아... 빌 게이츠, 잡스 같은 신神을 놓고 얘기하는 거야?) 시작했어, 철벽 방어를 한다.
그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좋지, 근데 누구나 빌 게이츠나 잡스가 되지는 않아, 어쩌면 자기 방이나 자기 집 창고에서 세상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내가 다시 한번 더 으름장을 놓아본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얕은 으름장에 소심해질 사람이 아니다. 너무나 잘 알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방어가 그 정도 선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좋아, 창업을 하려면 쌈박한 아이템이 있어야지, 남보다 먼저 시작할 수 있거나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강력한 아이템이어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내가 또 아는 척 선을 넘어 본다. 그때 남편이 프린트기 안에 있는 하얀 A4 종이 한 장을 쓱 빼어 들고 자신이 근엄한 왕이라도 된 듯 내 얼굴에 들이민다.
이 종이에 번호를 매기며 가장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순서대로 쭉 써보자, 마치 자신이 조선의 왕이라도 된 기분을 느끼고 싶었는지 사관에게 명령하듯 당당하게 말한다.
헛소리라도 들어주며 하나하나 이성적인 논리를 내세워 반박하는 전략을 펼치기로 한 이상 조선시대의 사관에 빙의하여 남편의 말을 기록해 보기로 했다. 그래 내가 받아 쓸 테니까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말해봐, 호기롭게 말하고 펜을 들어 하얀 종이를 마주하고 보니 정말 막막하다. 이렇게 막막한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 나보고 대신 쓰라고 한 거 아닌가, 순간 의심이 스쳤다.
남편이 즉흥적으로 읊어대는 유망한 아이템을 1순위부터 순서대로 죽죽 써내려 갔다. 받아쓰면서 나도 뭔가 아이디어가 떠올라 남편에게 적극적으로 몇 가지 의견을 내고 하얀 종이 위의 여백을 채우는데 일조를 했다. 나는 종이를 채우며 창업을 교묘히 말릴 전략을 펼칠 전의는 이미 상실한 건 아닌지, 아니 애초에 나에게 그런 전의가 있긴 있었나 자문했다..
그렇게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낼 창업 아이템들로 채워진 A4 종이를 눈으로 읽어나가 던 남편은 종이의 중간 지점에서 갑자기 눈길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난 도대체 뭐길래 저렇게 음흉하게 쳐다보나 싶어 종이를 뺐어 들고서, 뭐야 뭔데 그래, 재차 물어본다.
우리 온라인에서 신발 전문 쇼핑몰 하면 어때, 나에게 '우리'를 강조하며 온라인에서 신발을 전문적으로 파는 쇼핑몰을 운영하자는 것이다. 종이에는 그냥 온라인 쇼핑몰 이라고만 적혀있었다. 많고 많은 것 중에서 왜 신발이냐고 물으니,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신발이잖아, 그런다.
바야흐로 온라인 쇼핑몰이 폭발 하기 시작한 2006년이었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남편과 둘이서 심각하게 대화한 것만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을 보니 당시 돌이 다된 아들은 옆에서 조용히 잠을 자고 있었나 보다. 아이가 새근새근 꿈나라에서 놀고 있을 때 우리 가족의 역사가 새롭게 쓰이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너무나도 선명한 획이 그어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