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의 레퀴엠이 흐르던 밤

Paris 6구

by 로라see
대략 서울 면적 6분의 1 크기인 파리는 20개 구區로 쪼개어져 있다. 18세기 말 12개였던 구區획은 반세기가 흐른 19세기 중엽 지금과 같은 20개 구區로 확대되었다. 확대 직후만 해도 1,2,3,4,5,9구에 인구 밀도가 집중되어 있었고 대략 15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20개 구 전체 골고루 거주민이 증가하고 분산됐다. 파리 수도권에 정착한 후 13년 이상 생활하며 파리의 다양한 민낯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생활 이방인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파리의 줌인 줌아웃을 공유한다.


5월의 마지막 금요일 밤이다. 한국에만 불금이 있는 것이 아니다. 파리에도 다양한 형태의 불금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 소개하고 싶은 파리의 불금 장소는 '예술의 도시' 파리를 대표하는 6구 생쉴피스 Saint-sulpice 성당이다.


6구는 여러모로 예술과 낭만이 가득하다. 파리 예술계를 쥐락펴락하는 갤러리들이 즐비한 센느 거리(rue de seine)를 따라 센강(la Seine) 방향으로 천천히 걷다 보면 보자르 거리(rue des beaux arts)와 닿는다. 보자르 거리로 접어들고 불과 몇 걸음 앞에 파리고등예술학교 입구가 보인다. 파리고등예술학교가 있는 보나파르트 거리(rue bonaparte)에서 센강을 등지고 올라가면 들라크루아 Eugène Delacroix 아뜰리에가 있는 퓌르스템베르그 거리(rue de Furstemberg)와 가까워진다. 보나파르트 거리 끝에는 사르트르와 보봐르가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했다는 그 유명한 플로르 카페 Café de Flore가 있다. 보나파르트 거리에서 생제르망 대로(bd. Saint Germain)를 건너 좌안 Rive Gauche 지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드디어 생쉴피스 Saint-Sulpice 광장과 성당이 나온다.


*5월 마지막 불금을 책임질 베르디 레퀴엠 공연 안내문


저녁식사 시간이 다가와도 해가 있는 파리의 5월 마지막 금요일 저녁은 연인과 친구들과 가볍게든 무겁게든 한 잔 하려는 젊은 이들로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고 생쉴피스 성당 앞 광장에는 베르디의 레퀴엠 공연을 관람하려는 이들로 길게 줄이 세워져 있다. 광장을 가로지르는 행렬을 구성하는 연령대가 어림잡아 보아도 평균 60대 이상으로 보인다. 성당 주변 카페 앞에서 줄을 서는 이들과 성당 앞 광장에서 클래식 공연 관람을 위해 줄을 서는 이들은 세대차이만큼이나 각기 다른 형태의 불금을 즐긴다.


나와 남편도 난생처음 성당 앞 광장에 줄을 섰다. 저녁 8시에도 사위가 밝은 초여름 파리 6구 생쉴피스 광장에 부는 바람이 시원하다.



공연을 기다리며 성당 내부를 구석구석 감상한다. 성당 상부 스테인드 글라스가 머금었던 태양빛을 내부로 다시 뿜어내고 있다. 돌로 쌓은 각주와 각주 사이 이어지는 아치의 리듬. 각주 앞을 지키고 서있는 조각 성인들. 그 성인들이 애워싸듯 곁을 지키는 중앙홀의 금빛 미사대. 절제된 듯 화려한 선과 곡선이 만들어 내는 웅장한 공간감. 베르디의 레퀴엠과 어떻게 어우러질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미사대 우측 상단 위로 시선을 돌리니 성당 내부의 입체미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각주를 연결하는 아치 위로 돔 형태의 지붕이 이중 구조로 형성되면서 마치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극적인 공간감은 물리적 시간에 대한 감각도 잊게 한다. 유일한 각성은 밝고 어두운 명암의 대비가 있을 뿐이다.


앉은 자리에서 뒤 돌아보니 거대한 오르간이 당당한 위용을 드러낸다.



두 시간여에 달하는 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어진 레퀴엠 공연. 일제히 모든 관람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주자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시계는 저녁 10시 20분을 가리킨다. 매일 일분씩 해가 지는 시간이 느려지는 초여름 밤. 레퀴엠이 시작되고 얼마 후 해가 자취를 감추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생쉴피스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는 어둠을 충분히 흡수한다. 이제 명암의 대비가 본색을 드러낸다. 눈앞에 신전이 서있다. 마치 한 여름밤 유서 깊은 신전 야외 공연장에 와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박수갈채 소리는 나에게 또는 너에게 보내는 위로와 응원으로 느껴진다. 박수 소리가 서서히 잦아드는 듯하더니 다시 조금씩 커진다. 소리가 소리를 낳고 울림이 울림을 만들어 낸다. 고요함 속에 울림이 증폭된다.


얼큰한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는 영혼에게도 웅장한 베르디의 레퀴엠이 흐르는 밤을 맞이하는 영혼에게도 어느 맑고 시원한 초여름 금요일 밤은 명암이 대비되는 입체적 공간에서 맞이하는 무아지경이 아닐까.





*Eglise Saint-Sulpice

Place Saint-Sulpice 75006 Paris


*Orchestre Hélios

파리 소재 크고 작은 성당에서 다양한 클래식 공연을 기획하고 연주하는 독립 오케스트라.

orchestrehelios.com(사이트에서 공연 정보 및 티켓을 구매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