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요 Nov 29. 2022

나를 살게 하는

11/29 02:07

생각하건대 나는 사랑 없이는 살지 못하는 사람인 것 같다. 사랑하면 어떤 것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가? 대부분은 연인과의 관계에서의 사랑을 떠올리겠지.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어떤 형태의 사랑을 생각하였든 간에 그 사랑은 두 사람 혹은 그 이상과 관련하여 주고받음이 있는 일종의 과정을 행한다. 사랑은 일방의 형태로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순환의 형태로 자리하는 것이 사랑이다.


부모님으로부터의 사랑, 애인으로부터의 사랑, 친구들로부터의 사랑과 같은. 이런 종류의 ‘받는’ 사랑 없이는 생존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왔다. 받는 사랑은 참으로 익숙해지기 쉬워 자칫하면 그 사랑이 빠져나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마치 손 틈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이 말이다. 나에게 제한 없는 사랑을 제공하던 이십 대 첫 연애의 종지부를 찍고 나니 인제야 받는 사랑은 나를 살리는 사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주던 사랑은 내가 그에게 의존하도록 했고, 그 없이는 다른 이가 보이지도 않게끔 하였다. 이건 그의 잘못이 아니지만, 나는 받는 사랑이 줄 수 있는 실수에 감화되고 말았다. 사랑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그의 받는 사랑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다른 사랑을 찾을 필요가 없게 한 것이 그 실수이다.


나는 받는 사랑에 취약하다. 더욱더 많은 사람으로부터 조건 없이, 제한 없이 사랑받고 싶다. 그러나 받는 사랑엔 끝이 있기 마련이다. 부모님의 죽음, 애인과의 헤어짐, 친구 관계의 옅어짐 등등. 내가 손쓸 수도 없이 사랑은 끝이 나버리고 만다. 혹은 내가 그것을 기우기 위해서 애를 쓰더라도 이미 채우기 힘든 구멍의 형태로 결말이 나기도 한다. 그러면 내 사랑의 총량은 사랑을 달라고 재촉한다. 울적해한다. 우울해한다. 슬퍼한다. 끝없는 바다에 잠긴 듯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는 듯이, 이 문제를 해줄 사람이 없는 듯이 끔찍하게 군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받는 것에만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고 각성한다. 사랑을 주는 것이 내 사랑의 총량을 채우는 길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결혼이라는 사회적인 계약의 형태로, 친분이라는 사회적인 관계로, 반려동물과 주인이라는 관계로, 팬과 스타의 관계 등으로. 나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내가 떠날 때를 정하고 슬퍼할 수 있는 시기를 정할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싶다. ‘주는’ 사랑을 하고 싶다. 일방의 형태로 주는 사랑이라면, 그것을 내가 인지하고 시작한다면, 상대방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않아도 슬프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역설이다. 사랑은 순환의 형태를 띠는데 어떻게 일방의 형태만을 취한다는 것인가? 나는 지금 역설의 말을 하고 있다.


그래, 나는 상처받고 싶지 않다. 부모님께서 나의 남동생만을 더 사랑하는 상황을 견딜 수 없다. 애인이 떠나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친구들과 멀어지고 싶지 않다. 나의 사랑하는 사월이와 이오가 세상을 영영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한국 도로공사 하이패스배구단의 인원이 변화가 없었으면 좋겠다. 상처받고 싶지 않은 나는 일방의 형태로 사랑하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더욱 상처받는다. 사랑은 순환의 형태임에도 한쪽에서만 사랑을 추구하니 말이다.


인제야 인정한다. 사랑은 시소와도 다르고, 물 잔과도 다르고, 이 세상의 실체적인 그 어떤 것과도 특질을 달리하기 때문에 내가 주는 만큼 사랑을 받지도, 내가 받는 만큼 사랑을 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엄마와 아빠를, 애인을, 친구를, 나의 고양이들을, 배구를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살게 한다.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음에 상처받지만,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살아간다. 그들의 웃는 모습과 감동한 모습과 즐거워하는 모습과 조용히 잠자는 모습과 놀고 싶어 치대는 모습과 승리욕에 미치는 모습과 노력해 경기를 가져오는.. 그 모든 모습을 사랑한다. 나는 내일도 그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러니 나는 살겠다.


필연적으로 헤어짐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삶이 허무한 것은 아니다. 찰나에 불과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심지어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사랑하는 것을 잃기도 하겠지만 새롭게 사랑할 수 있는 것들도 얻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 날이 온다면 그보다 행운인 날이 있을까. 혹은 다른 스포츠를? 언어를? 학문을? 어떤 것을 사랑하게 될지,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될지 모르는 미래를 기대해보자. 사랑은 나를 살게 한다.

작가의 이전글 플랫폼 노동이라는 거미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