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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 Aug 25. 2023

지독하고 잔혹한 현실이 빚어낸 환상

책 <자기 앞의 생>

삶의 무게가 나를 짓누를 때, 이를 악물고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버티기가 힘들 때가 있다. 누군가의 손길이 간절히 필요하다 느끼지만 누구도 나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한다. 비틀거리며 쓰러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기도 하며 흉터를 훈장인 양 새기고서 또 다른 삶의 무게를 맞는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면서 삶의 태도를 익히고 내공을 다져간다. 이 책은 난폭하고도 거친 삶의 파도를 작고 여린 몸으로 관통하는 모모의 이야기다. 암울하고 힘겨운 삶을 그리고 있긴 하지만, 다 읽고 나면 하루하루 쌓여가는 짓눌림을 견디기 위해 모모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모모는 무거운 삶의 무게를 견디며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해 간다. 열 살 혹은 열네 살의 모모는 삼키기에는 버거운 감정들을 토해내기 위해 하얀 돛단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아간다. 그때는 태어나 처음으로 애정을 쏟았던 쉬페르(개)를 팔아버리고 받은 돈 500프랑을 하수구에 처넣었을 때다. 모모가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로자 아줌마에게 끌려 카츠 선생님의 병원에 갔을 때이다. 모모는 그때 카츠 선생님의 뒤쪽 벽난로 위에 있던 새하얀 돛배를 타고 자신의 의식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대양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제야 어린아이가 되었다고 회상하는 모모는 눈물을 쏟으며 울 수 있게 된다. 이기지 못하는 무거운 감정을 울음으로 쏟아내기 위해 모모는 자신이 어린아이 일 수 있는 세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만든 세상을 자신에게 선물로 내어놓으며 그 세상 속에서 자기 앞에 놓인 무게를 감당한다.  


그리고 모모는 암사자의 환상을 불러낸다. 결코 새끼를 버리지 않고, 새끼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며 정글의 법칙을 따르는 암사자는 자신을 지켜줄 든든한 존재에 대한 갈망이자 엄마에 대한 그리움의 형상이 아닐까 싶다. 로자 아줌마에게 자신을 맡기고 간 엄마가 더 이상 자신의 양육비를 보내지도 않는 상황에서 온 세상 전부와도 같은 로자 아줌마의 건강이 나빠질 즈음에 암사자는 초인종을 누르고 모모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홀로 남겨질 것만 같은 현실적인 불안감이 치밀어 오를 때마다 암사자는 모모를 찾아온다. 암사자는 연고가 아무도 없는 세상 속에 자신의 힘으로는 무엇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선사하는 두 번째 선물인 셈이다.


모모가 자신에게 주는 세 번째 선물은 아르튀르다. 낡은 우산대에 덕지덕지 옷을 입힌 우스꽝스러운 물체에 불과하지만 모모에게는 둘도 없는 가장 좋은 친구이다.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해 준 대양이나 환상으로 소환한 암사자에 비해 아르튀르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실질적인 대상물이다. 모모가 홀로 남게 되면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게 되므로 빈민구제소로 가야 한다. 그런 모모의 곁에서 돌봄을 받으며 모모의 치열한 삶의 현장을 함께하는 아르튀르는 돈벌이 수단 이상이다. 모모는 아르튀르를 마치 자식처럼 돌보면서 감정을 쏟는다. 로자 아줌마의 돌봄을 받던 모모가 아르튀르를 돌보아야 하는 환경으로 자연스레 치환된다. 아르튀르는 그렇게 모모에게 치열한 삶을 버티는 이유가 된다. 모모는 아르튀르를 단지 어릿광대짓을 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지만, 어쩌면 모모에게 생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아무리 감당하여도 모모에게는 아슬아슬한 것들이 자꾸 밀려온다. 모모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몸도 마음도 가누지 못하는 로자 아줌마를 돌본다. 점점 죽음으로 치닫는 그녀의 곁을 지킨다. 기억 속 시간들을 넘나들며 망가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모모는 홀로 설 준비를 한다. 열 살의 어린 나이로 그러한 것들을 감당하는 것이 어떨지 상상할 수는 없지만 모모는 감당하기에 버거운 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껴안는다. 모모는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로자 아줌마를 돕는다. 거짓말로 세상을 따돌리고 그녀의 마지막 안식처로 인도한다. 그리고 새로운 안식처에 도달한 그녀의 곁에 머문다.


모모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싶다. 홀로 남겨진 세상 속에서 자신을 지켜야 하겠지만, 로자 아줌마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비난도 감당하여야만 할 것 같다. 결국 모모는 나딘 아줌마의 시골 별장으로 가게 되지만, 그곳이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지는 못할 것만 같은데 모모는 그 곳에서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에 나의 상상을 입혔다. 마치 이미 찍어둔 영상에 싱크가 딱 맞게 더빙을 입히는 나딘 아줌마의 작업처럼 모모 또한 자신의 살아온 삶을 자신의 세계 안에서 되돌리며 자신에게 또 하나의 선물을 한 것이 아닐까. 나는 그 선물이 바로 아버지와의 재회에 대한 기억이라 생각한다.


모모는 아버지가 나타난 것이 자신의 나이를 네 살 더 먹게 해 주는 것 외에는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갑자기 먹어 버린 네 살의 나이가 모모에게는 로자 아줌마의 죽음을 지켜보고 그녀를 죽을 수 있게 도우며 홀로 남을 자신의 삶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커다란 에너지를 준다. 모모는 자신이 갑자기 나이를 훅 먹게 된 것이 혁명과도 같은 엄청난 일이라고 여러 번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준 나이가 아니라 스스로 쌓아 올린 나이라고 생각한다. 흰 돛단배를 타고 대양으로 나아가서야 비로소 어린아이가 되어 울음을 터뜨릴 수 있었던 것처럼 기억 속에서 만들어낸 아버지의 존재로 인해 훌쩍 커버리고 나서야 자신의 현실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착하고 예쁜 모모의 엄마를 죽인 아버지의 정신병이 유전일지도 모른다는 그 가능성으로 로자 아줌마를 죽음으로 내 몬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세상의 시선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모모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와의 이별은 가볍고도 간단하다. 담배연기로 추억될 듯한 그 마지막 순간의 기억은 아픔도 상처도 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오히려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신에게 더 이상 누구도 설명해 줄 수 없는 자신의 정체성과 암사자로 기억하고 싶은 엄마의 무결함을 증명해 주지 않는가.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모모가 자신의 세상 속에서 빚어낸 환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겪은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되돌려 그건 스스로 빚어낸 환상이라고 최면 걸듯 세뇌시키고 싶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바람은 간절하다. 발아 직전의 씨앗처럼 내 안에서 간질거리는 그 바람으로 마음을 살살 긁으며 나는 걸어온 시간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아야겠다. 하염없이 외롭다고만 느끼던 내 마음에 미처 담지 못하고 있던 소중한 이들에 대해서도...


밀어 제쳐두던 것들을 향해 빛을 던져준 선물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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