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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Oct 02. 2017

외무장관이 읊은 시

런던 에세이

‘시 낭송’이나 ‘한구절 시의 인용’이란 시의  응용이고 활용이다. 낭송하는 시에는 적절한  음악이 배경으로 흐른다면 더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가끔 대화중에 시 한구절을 적재적소에 인용하면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만큼 짧은 시적언어가 뿜어내는 함축성과 은유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적재적소가 아닌 때에 인용하거나 또는 인용한 시의 의미가 청자에게 불편함이나 무례를 범하는 시라면?



영국 외무장관인 말많고 탈 많은 ‘보리스 존슨’이 또 일을 냈다. 최근이 아닌 지난 1월 방문한 미얀마(버마)에서 영국 시인이자 작가인 키플링의 시를 인용한게 문제가 됐다. 그렇다. ‘정글북'과 ‘킴'을 쓴 바로 그 ‘키플링'이며 영어권 사상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키플링의 인용된 시가 외무장관이 인용한 그 자리에선 부적절한 시였기 때문이다. 존슨이 인용한 키플링의 ‘만달레이’란 시는 1892년 출판된 시로 미얀마의 두번째 도시인 제목처럼 만달레이를 배경으로 키플링이 지은 것이다.



이 시는 만달레이의 버마 처녀가 영국 군인에게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도 신성한 불교사원 안에서...



돌아와, 영국 군인이여,

만달레이로 돌아와!

만달레이로 돌아와,


Come you back, you British soldier;

come you back to Mandalay!

Come you back to Mandalay,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포함)에서 나고 자라고 공부한 키플링이 같은 식민지인 옆나라 버마도 방문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버마를 무척 사랑했고 버마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빠졌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영국으로 돌아와 1차대전에서 소중한 아들을 잃은 키플링은 그의 수려한 작품에도 불구하고(노벨상까지 받았으니) 한마디로 또 흑백으로 단정하기 어려운 그의 ‘관점'때문에 논란도 많았다. 쉽게 말하면, 그에게 ‘제국주의자’라는 딱지가 자주 붙여졌고 이유는 대영제국의 존재와 그 시스템을 찬양고무했다는 지적들그의 발언과 작품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지 오웰은 그의 에세이에서 키플링을 한마디로 ‘영국 제국주의의 예언자(a prophet of British imperialism)’라고 못박았다. 영문학에서 다루는 탈-식민지(Post-colonial) 비평에서도 그의 행적과 작품은 후기식민지 비평의 관점에서 읽어보길 권장하는 중요 텍스트 중의 하나이다. 이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장점만을 부각시키고 미화시킨 그의 논리와 행적, 또 영국인의 눈으로 본것이기에 탈-식민지 방법론으로 영국인이 아닌 인도인의 관점에서 읽는다면, 또 장점만이 아닌 단점도 찾는 책읽기라면 많이 다를 것이다. 이때문에 영어권 문학에서 그 파워를 넓혀가는 남아시아계 작가와 비평가들에게 키플링은 많은 관심을 받고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나라의 친일파 문인들의 위치와 비슷하기도 하고 또 일제를 미화한 일본문인들과 비슷하다.



하여튼, 그런 논란선상의 사람과 그의 시를, 그것도 버젓이 버마의 유명인사들을 동행한 사원안에서(마이크가 켜져있었다고 함) ‘돌아오라 영국군인이여…’를 인용했으니… 쯧쯧. 영국 전통 엘리트의 산실인 이튼학교를 나오고 옥스포드를 나온 이 장관이 키플링의 논란을 몰랐을까? 아님 만달레이가 나오니 그냥 ‘시’를 예술적 관점에서 아무 정치적 의도없이 가볍게 읊었을까? 영국도 아닌 버마에서, 그것도 버마 사람들이 신성시여기는 사원에서? 듣는 청자인 버마 사람들의 기분은 조금이라도 생각했을까? 그는 키플링처럼 제국주의의 오만에 빠져 한순간 갈피를 못잡았을까? 정답은 외무장관 본인만 알 뿐이다. 혹시 좀 안다고 거들먹거리다가 낭패한 단순사고일지 모른다. 하지만 참다못한 버마 주재 영국대사가 적절치 못하다며 점잖게 말리는 풍경까지 벌어졌으니...



일제를 미화한 일본 시인의 시를 저명인사들이 모인 공개행사에서 낭송하는 ‘우'를 범한거나 마찬가지이고 또 문자 그대로 ‘일본 황군이여 부산으로 돌아오라…’라고 한것과 똑같으니 만약에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전쟁났을 것이다.



런던시내 ‘차링 크로스’ 역 바로 오른쪽 골목에서 키플링은 살았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푸른접시에 찍혀 골목의 벽에 붙어있다. 가끔 켄트로 가는 기차시간이 남으면 물끄러미 그가 살았던 그 집을 올려보았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이 시내 한가운데 이런 평범한 곳에 살았다는 것도 의아했다. 사람은 갔지만 그의 행적과 작품은 아직도 논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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