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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Dec 29. 2017

베들레헴의 첫 순례자들...

이스라엘 성지순례-베들레헴 목동들의 들판에서

가축을 돌보는 아이 ‘목동(牧童)’은 ‘돌보다’의 목(牧)과 ‘아이’ 동(童)의 결합이다. 복음서의 목동들은 아마 아이라기보다는 사춘기 정도로 컸을 청소년들이었고 거기에다 어른들도 포함했을 것이다. 2000년전 베들레헴의 목자(shepherd)들은 그날 밤도 어김없이 옹기종기 베들레헴 마을 밖 동굴안에 모여들었다. 동굴 중앙에 타오르는 모닥불 곁에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늘 그렇듯 맑고 고요한 밤하늘엔 별이 빛나고 있었다. 낮에 양떼들을 돌보아 피곤한데도 안락한 의자에 앉지도 않고 땅바닥이나 편편한 돌위에 앉아 서로 장난도 쳤을 것이다. 낮에 열심히 풀을 뜯었던 양들도 부른 배를 땅바닥에 누이고 동굴 한구석에서 잠을 청했을 것이다. 그때 고요하던 밤하늘에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도 아름다움에 가슴떨때 날개달린 천사들이 보였다. 하늘의 악단이 연주하는 가운데 천사들은 베들레헴 높은 하늘에서 거룩한 합창을 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서 2:14

“Glory to God in the highest,

and on earth peace,

good will toward men.”

-Luke 2:14


이 하늘의 천사들은 세상 누구보다 먼저 구세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이 목동들에게 전했다(루카서 2:8-20). 세상에서 권력을 쥐락펴락하던 자, 재물을 집안에 가득 쌓아두고 있던 자, 명예와 학식을 떠벌리던 자들에게 천사들은 통보하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 지도층이던 멀지않은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도 아니었다. 대신, 허허벌판 베들레헴 동구밖 양치던 자들이었다. 가장 낮은 자로 여겨졌던 이 목동들에게 구원의 첫소식이 전해진 것이었다. 그들은 구세주 탄생의 뉴스를 들은 복된 사람들이었다. 왜 그 ‘복’을 낮은 자들에게 하사했을까? 또,


“왜 구유의 아기예수는 이 목동들을 첫 손님으로 초청해  보고 싶어했을까?”


유대문학에서는 당시 양치는 일이 여러 직업중에서 가장 낮았음을 알려준다. 심지어 못난이들은 이 일을 경멸하기까지 하였다. 역설적으로, 훗날 그리스도는 기꺼이 “착한 목자(the Good Shepherd)”라고 자신을 불렀다(요한 10:11). 그 자신 스스로 사회에서 가장 낮게 여기는 ‘양치는 사람(목자)’으로 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높고 낮음은 우리 사회의 눈이 바라보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높고 낮음’과 ‘많고 적음’으로 가르지 않으시는 그분은 ‘착한 목자(牧者)’이셨다. 하늘높은 곳에는 창조주께 영광 그리고 땅에서는 그분을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성서는 전한다. 주일미사때마다 부르는(사순과 대림시기 빼고) ‘대영광송’의 첫 두 구절이다. 무슨말일까? 우선 진정한 평화는 하늘의 영광에서 그 원천을 가지는 것이고 지상의 평화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주 견고하게. 땅에서 퍼지는 따뜻한 온기의 평화는 ‘그분을 사랑하시는’ 모든 이들에게 내린다고 한다. 왜 그분을 사랑하시는, 적어도 평화 지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평화가 내릴까? 왜 그분을 사랑하는게 평화를 얻는 원칙이고 지름길이 될까? 사실 세상만사가 그분에 의해 흘러간다고 해서 절대 불문율의 수동자세로 땅의 평화를 또는 내 마음의 평화를 해석할 수도 있지만 가히 추상적이다. 이 ‘천상의 영광과 지상의 평화’의 연결선은 그리스도 자신이며 사실 ‘착한 목자’란 그리스도의 지칭에서 답을 찾아 그 ‘착함’이 바로 평화의 문을 여는 열쇠가 아닐까? 양떼를 돌보는 착한 목자. 이웃을 사랑하는 착한 그리스도인. 더 나아가 ‘적’마저도 사랑하는 거룩한 성인... 그런 착한 목자에게 평화가 내린다는 말이 아닐까? 그래서 ‘남(the Other)’을 돌보는 ‘착함’이 없으면 평화도 없다는 말도 되는게 아닐까?


베들레헴 근교 ‘목자들의 들(the Shepherd's Field)’에서 평화를 소원했다. 착함없이 마냥 평화를 갈구함은 텅빈 공허의 평화라는 걸 알면서도 우선 내 마음을 ‘평화모드’로 바꾸고 싶었다. 즉, 다시 착하게 살고 싶었다. 2000년전 그 목동들처럼. 그들처럼 그렇게 옹기종기 앉아 쉬며 순하며 착하고 싶어 그들이 지냈던 동굴로 들어갔다. 그들이 피운 모닥불의 그을음이 아직 동굴천장에 시꺼멓게 남아있었다. 굳이 깨끗하게 닦아 낼 필요는 없다. 그을음은 착하고 순박한 그들이 심플한 삶을 살았다는 증거였다. 왜 모범이 되고 증거가 되는 그을음도 있구나 싶었다. 대신 각자 마음속의 그을음을 지워야 하지 않을까? 한구석에는 박물관처럼 양떼들이 목동들처럼 옹기종기 모여서 잠을 잤던 모습도 보여주었다. 천사들의 합창에 잠을 깼을 양들은 다시 평화의 단꿈을 꾸지 않았을까?


‘높고 낮음도 없이. 크고 작음도 없이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들 지냈다. 목동들도 그리고 양떼들도…’


착한 목자 그리스도는 양을 돌보는 목동(牧童)들을 높이 올리셨다. 그분 자신이 스스로 유대사회에서 낮은 곳의 목자(牧者)라고 하심으로 목동들을 높이셨던 것이다. 언덕위 높은 곳에 살았지만 낮은자들이었던 목동(牧童)들은 하늘 높은 곳의 천사들을 눈으로 보았고 지상의 불협화음이 아닌 천상의 오묘한 합창을 귀로 들었다. 세상 누구보다 먼저보고 먼저 들을 수 있는 ‘복’을 받았다. 우리는 이 거룩한 이름 목자(牧者)에다 스승이란 사(師)자를 붙여 목사(牧師)로 칭하고 영적인 아버지란 뜻 신부(神父)로 부(父)자를 굳이 붙인다. 평범하고 동등한 이름, 남을 돌보아야하는 거룩한 이름 ‘목자(牧者)’에다 위계의 냄새가 풍기는 이름을 갖다 붙였다.


이 베들레헴의 언덕위 목동들의 들에서 양치던 목동들을 상기했다. 천사의 목소리를 듣고 합창을 들은 그들은 성서에 나오는 그대로 베들레헴의 동굴마굿간에 있는, 구유에서 미소짓는 아기예수를 경배하기위해 냅다 뛰어갔다. 이곳 지리에 밝은 그들이었겠지만 시각은  어두운 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유세인 볼트’보다 빨리 달렸으리라. 나도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달려갈 수 있을까? 기쁨으로 충만해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예수를 보기위해 신발이 벗겨져라 달릴수 있을까? 숨차다고, 아니면 돌많은 자갈길이라고 핑계대지 않았을까? 이런 기쁨이 충만했던 목동의 언덕에서 하늘을 올려보았다. 천사들이 공중에 빙빙 날았던 거기에서 천상의 합창곡이 들렸오듯 했다. 스마트폰이 충전되듯 서서히 기쁨이 벅차 오를 때 누군가가 ‘대영광송(Gloria)’을 노래하자고 제안했다. 재빨리 누군가 힘차게 기타를 두드렸다. 하늘의 거룩한 파이프 오르간이 아니라도 좋았다.


‘하늘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을 사랑하시는 사람들에 평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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