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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an 11. 2018

아름다움에 과연 표준이 있을까?

런던 에세이-종교문헌에서 본 '미의 기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많은 동반자 순례자들을 만났다. 내겐 또다른 축복이었다. 그 중에 많은 아시아인들도 있었는데 대부분은 한국인이었다는게 놀라웠다. 한국인이기에 누가 한국인인지는 쉽게 구별 할 수 있었다. 근데 가끔은 내가 한국인임을 알면 다른 외국인들은 식사 테이블에서 곤혹스런 질문을 할 때도 많았다. 질문은 왜 동아시아, 특히 여자분들은 순례중에 얼굴을 온통 가리고 눈만 빠끔히 내놓는가를 물었다. '동아시아 여성들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가?' 아니면 '피부가 햇빛에 거슬리는 걸 싫어하는가?' 따위의 나름의 답을 예상하며 내게 질문을 했다. 사실 이런 질문에 내가 뭐 아는 것도 없고 대답할 사안도 아니었다. 나는 얼굴을 뜨거운 햇빛에 대비해 타월로 가리는 여성들이 혹 이슬람에 동경을 품고 무슬림 여성들처럼 ‘히잡’착용하듯 한다고 농담을 했다. 사실, 대부분은 햇빛에 탄 얼굴보다 하얀 순백색의 피부를 아시아 여성들은 선망하는 것 같다. 영국 가디언 신문에서 이런 흰 피부 선호와 관련한 기사도 내보냈다. 태국에서 피부를 하얗게 해주는 크림(whitening cream) 광고가 논쟁대상이 되었다는 기사였다. 이 크림을 바르면 피부가 뽀얗게 되는데 실제로 광고사진을 비교하여 보여 주었다. 문제는 피부가 검으면 못생기고 매력적이지 못한가? 다분히 편견과 차별의 요소가 있다고 기사는 해석했다. 하필 그 크림 회사의 이름이 ‘서울의 비밀(Seoul Secret)’이었다. 태국에선 한국여성의 피부처럼 하얗게 하는게 인기인가 보다. 이런 신문기사는 종종 나오는데 태국뿐 아니라 동남아, 인도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도 이런 화이트닝 제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들었다. 가끔은 검증되지 않은 제품의 부작용으로 얼굴을 망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하지만 피부를 뽀얗게 하려는 여성들의 욕망은 막을 수없고 인기는 사그라지지 않아 심지어  몇년전 캄보디아에 갔을 땐 주유소에 딸려있는 가게에서도 이런 제품을 팔고있었다.


 

이곳 영국 신문에선 대게 이런 화이트닝 화장품이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인기를 끄는 건 넌지시 ‘미(Beauty)’의 기준을 서구형으로보는 비-백인들의 ‘백인 따라하기’의 일종이라고 약간은 비꼬듯이 보도한다. 그리고 왜 아시아나 아프리카 여성들은 자기들의 본 피부색인 갈색이나 검은색 피부를 좋아하지 않는지 되묻는다. 실지로 대부분의 젊은 아시아 여자분들은 산티아고 순례중 모자안에다가 긴 타월로 얼굴을 송두리채 감쌌다.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럽 여자들은 모자만 눌러쓴 게 다였다. 하지만 과연 햇빛에 그슬리지 않은 하얀 피부보호만을 위한 것 같지만은 않다. 여름에 영국에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 공원이라도 가면 남녀 가릴 것 없이 그늘진 큰 나무 아래로 가서 자리잡고 앉아 대화한다. 우리는 햇빛을 싫어한다. 햇빛없는 나라에서 자주 햇빛이 없다고 불평하지만 햇빛이 나오면 우린 즐기지 않는다(?). 햇빛만 났다하면 부끄럼도 없이 온통 옷을 다 벗고 일광욕을 즐기는 영국인들은(독일인들은 더 심하다) 이런 우릴 보고 몹시 신기해 한다. 사실, 북유럽 사람들은 햇빛에 가끔 쬐어주어야 한다고 한다. 비타민 E가 필요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아시아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햇빝에 노출된 뒤의 피부트러블 때문에 뜨거운 자외선을 차단해야만하는 경우도 많다. 나도 직접 당해봐서 그 고통을 충분히 이해한다. 실지 필리핀과 캄보디아에서 몇번 고생하고 난 뒤엔 아예 철저히 준비해 햇빛을 피하고 또 그렇게 해야 덜 고생이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는 얼굴을 안 태우려고 하는게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성들은 백인 여성의 피부처럼 하얗게 만들려고 또 그렇게 될려할까? 대체로 서구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이후에 서구 여성이 마치 미의 기준처럼 된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다. 정치, 경제, 문화 뿐 아니라 이런 피부와 외모의 기준까지 서구인이 표준이 된 것이다. 물론 이는 받아들이는 자의 무의식의 발로이지만 지금까지도 지배적이고 영향력있는 서구의 영향력있는 매체들(영화, 잡지 등)은 끊임없이 이런 미의 기준을 재생산해내고 있다. 마이클 잭슨의 변형된 얼굴은 얼마나 슬픈가. 또 이는 끊임없이 날씬한 모델들만을 ‘가공해서’ 보여주는 패션 매체로 인해 많은 여성들은 ‘다이어트’라는 ‘현대적 고문’을 스스로 자진해서 당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날씬한 사람만이 아름다운가? 또 날씬함의 기준은? 더 나아가 우리가 스스로 정하고 따라하는 ‘미의 기준(미에 ‘표준’이 있느냐는 또다른 논쟁꺼리다.)’이 서구미인이냐 하고 물으면 다들 아니라고 깨끗하게 부정한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게 꼭 서구 문화의 영향력 때문일까? 그럼 종교 문헌에서는 어떨까?


많은 이들은 이슬람이 여성을 억압하는 종교로 일반화된 기준(대중매체에 의해)으로만 알고 있다. 한편으론 이런 빌미가 될수있는 구절들은 실지로 많다.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Qur'an)이나 그들 경전의 전통적 해석과 예언자 마호멧의 일화와 어록들을 모은 ‘하디스(Hadith)’를 보면 양성 평등인 현대인에게는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없고(포악한 탈레반이나 IS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물론 이런 문헌들은 적어도 1300년도 넘은 시기에 쓰여졌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약 1000년의 길고 긴 기간 동안에 쓰여진 그래서 가깝게는 2000년전 멀게는 3000년 전에 기록된 그리스도교의 신구약 성서도 이런 의미에선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와 달리 이슬람에선 대체로 ‘해석의 자유’가 그렇게 넓은 것 같지 않다. 많이 알려진 코란의 ‘72명의 처녀(72 virgins)’는 이슬람 남성 순교자가 천국(Paradise. 아랍어로 Jannah)에 갔을때 받는 일종의 보상이며 천상의 선물(?)이다. 그러면 여자 순교자는? 코란(Qur'an)의 성차별적이고 성적인(sensual) 이미지가  어떻게 보면 우리에겐 이해할수 없는 교리이지만 이 교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겠다. 문제의 코란  Al-Dukhan 44:54 구절에 보면;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살결이 하얀 크고 아리따운 눈동자를 가진’ 쳐녀들과 결혼할 것이다.(Even so (it will be). And we shall wed them unto fair ones with wide, lovely eyes.)"


여기서 눈이 크고 아름답다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눈이 작은 동양인에겐?) ‘피부가 하얗고(fair)’가 문제가 되는 부분이다. 중세의 이슬람 철학자인 ‘알 가잘리(Al Ghazzali)’는 ‘종교적 과학의 리바이벌(The Revival of the Religious Sciences. 일햐 울룸 에드-딘 Ihya Uloom Ed-Din  Vol. 4)’에서 이슬람의 천국을 언급한 부분도 비슷하다;


“알라를 믿고 두려워하는 자는 뜰과 분수가 있는 안전한 곳(천국)으로 갈것이다. 거기에서 실크로 아름답게 짠 옷을 입고서 서로 대면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결이 희고 큰 눈을 가진’ 처녀들과 혼인할 것이다( Verily the God-fearing shall be in a secure place amidst gardens and springs. Attired in silk and brocade, they shall be arrayed face to face. Thus shall it be: and We shall espouse them to fair, wide-eyed maidens).”


그렇다면 왜 ‘피부가 하얀(fair or light complexion)’ 처녀들이라고 특별히 언급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슬람의 천국에선 피부가 검은 사람이나 갈색인 여성들은 2등 시민이고 환영을 못받는가? 과연 유색인종은 천국에 갈 수나 있는가? 만약에 옛날 미국처럼 피부색깔에 따라 차별이 존재한다면 이건 사실 천국이 결코 아니지 않은가? 코란의 초기 해석과 초기 무슬림들의 예언자 마호멧의 일화들을 모은 하디스 중 ‘티라미디 하디스(Tirmidhi hadith)’에도 거의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하우리(hauri)’란 해석의 여지는 있지만 ‘종교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출중한(splendid) 무슬림 여성’을 가리킨다.


“예언자가 말씀하셨다. 하우리(houri)는 ‘투명한  몸’을 가진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다….(The Prophet said: “A houri is a most beautiful young woman with a transparent body. At-Tirmidhi, volume 2).”


여기서 ‘투명한 몸(a transparent body)’이란 보통 흰 피부를 가리킬 수 있다. 하지만 영어로 ‘Fair’와 같이 ‘transparence’란 말도 다층의 의미가 있다. 하얀 피부뿐만이 아니고 덧붙여 아름다운(beautiful) 또는 사랑스럽고 보기좋은(lovely to look at) 뜻도 있어 이슬람 신학의 입장에서, 피부 색깔만을  말하는게 아니라, 모든 면에서 ‘흠없고 깨끗한(unblemished 또는 untainted)’이란 해석에 더 수긍이 간다. 그러나, 심지어 예언자 마호멧의 얼굴을 묘사한 하디스(Hadith)에도


“알라의 메신저인(그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는 하얗고 품위있는 얼굴을 지녔다(Allah's messenger(May peace be upon him) had a white elegant face. Ch. 26)”라고 했다.


위의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물론 피부가 하얀 여성들을 이상화시키고 있는 것이고 심지어 남성인 예언자 마호멧까지 얼굴이 하얗다고 치켜세우니 검은 얼굴보다 하얀 얼굴을 더 쳐주는 것 같다. 그러나 꼭 이걸 인종적 측면에서 백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렇게 본다면 이건 현대적 의미에서(political correct 분위기 속에서) 해석한 것이지 사실은 그 당시의 문화나 사회 그리고 문자적으로 하얀 피부를 선호한 건 사실이라고 학자들은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래전에 들은 ‘비교 종교학’ 강의에서 한 이슬람 신학자가 당시엔 중동지역의 특성상 흰 피부의 여성이 이상시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다. 대부분이 유목민인 당시 이곳 사람들은, 특히 남성들은 흰 피부의 여성을 선호했다고 한다. 이는 이슬람 경전의 배경이 되는 이 지역의 뜨거운 날씨에 견줘보면 여성들의 곱고 하얀 피부가 의미하는 것은 뙤약볕 내리쬐는 바깥에서 중노동을 하는 신분이 낮은 계통의 여성이 아니라 대갓집 규수처럼 집안(텐트)에서 곱게 자란 여성이란 말이 되며 이는 직접적으로 사회경제적 신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얀 피부의 여성은 사회경제적 신분을 드러내며 또 성적인 의미로까지 발전된게 아닌가 한다. 사실 이 흰 피부와 사회계급의 상관성은 코란의 배경이 되는 아라비아 뿐만 아니라 지중해의 섬나라 몰타에 갔을때도 들었고, 이탈리아에 갔을때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우리나라도 동남아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그리스도교 성서에는 여성의 피부색깔을 어떻게 볼까? 어떻게 보면 비슷한 문화를 가진 지역이고 그래서 하얀 피부에 대한 선망은 이슬람과 그렇게 다르지도 않다.  이슬람의 코란보다도 약 1000년도 전에 씌여진 ‘아가서(Song of Songs)’의 1장 5절이다.


“저는 (피부가) 가무잡잡하지만 사랑스러워요, 오 예루살렘의 딸들이여, 케다르(Kedar)의 천막같고 솔로몬의 커튼같아요.(I am dark, but comely, O ye daughters of Jerusalem, as the tents of Kedar, as the curtains of Solomon).”


여기서 신랑을 곧 뵈는 신부가 자신의 피부가 하얗지 못하다고 고백하며 자신의 피부가 케다르의 천막 색(베두인의 천막처럼 짙은 갈색이다)처럼 어둡고 솔로몬의 커튼처럼 가무잡잡하다고 한다. 이는 피부가 검게 보여 미안하다는 말과 같다(얼굴이 못생겨서 죄송하다는 코메디언 이주일씨가 생각나는 부분...).


이어서 따라오는 1장 6절은 피부가 검은데 대한 변명을 한다.


“제가 가무잡잡하다고 저를 그렇게 보지마세요, 왜냐하면 햇빛에 그을려서 그렇답니다. 저의 오라버니들이 저에게 화를 냈죠; 그들은 나에게 포도밭을 지키게 했어요; 그래서 저의 포도밭을 지키지 못한거에요,(Look not upon me, because I am dark, because the sun hath looked upon me: my mother's sons were angry with me; they made me the keeper of the vineyards; but mine own vineyard have I not kept.)”


(*한국 가톨릭 성서 번역: “(여자)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이여 나 비록 가뭇하지만 어여쁘답니다. 케다르의 천막처럼 솔로몬의 휘장처럼. 내가 가무잡잡하다고 빤히 보지말아요. 햇빛에 거을렸을 뿐이니까요. 오라버니들이 골을 내며 나를 포도원지기로 만들어 내 포도밭은 지키지도 못하였답니다.”)


자기의 포도밭을 지키지 못했다는 은유는 자기 얼굴은 다른 포도밭을 지키느라 가꾸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피부가 약간 검다고 왜 변명까지 늘어놓을까? 아니 변명을 했어야만 했을까? 이는 미의 기준으로 하얀 얼굴을 선호하는 것이 이슬람의 코란과 하디스에 나오는 부분과 같다. 혹자는 이 검은 피부를 가진 여성은 이스라엘보다 더 남쪽인 이집트 출신 검은 피부를 가진 파라오의 딸(솔로몬의 많은 첩들 중 하나)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지만 뒤에 따라오는 이 ‘아가서’의 다른 구절들로 보아 신랑앞에 서서 얼굴을 대면해야하는 신부가 들에서 고된 노동을 했던 북쪽에서 온 신부임이 문맥상 더 맞아 보인다. 또  여기서 검은 피부란 문맥으로 보면 태생이 검은 피부로 태어난게 아니다. 이 ‘검다(black. שְׁחורָה)’란 히브루(Hebrew) 단어는 꼭 태생적으로 피부색깔이 검다라고만 볼수 없고 ‘햇빛에 탄’ 갈색을 보통 뜻한다고한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썼다는 ‘애가(Lamentations)’  4장 8절에도 비슷한 용도로 이 ‘검다’라는 말이 쓰였다. 이는 ‘피부가 거무스럼한 모양(the livid or swarthy appearance)’을 뜻한다. 이는 그 사람들이 햇빛쬐는 들에서 열심히 일한 결과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이 '검다'라는 어휘는 이 ‘애가’에서 ‘빈곤으로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또 그것으로 인해 고생한 뒤의 얼굴 모습으로도 표현된다. 이 빈곤과 영양부족으로 인한 ‘검은 피부’란 뜻은 ‘애가’의 다른 구절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 여자들의 나지르인들은 눈보다 깨끗하며 우유보다 하얗고 몸은 산호보다 붉고 그 몸매는 청옥과도 같았는데. 그들의 모습은 검댕이보다 까맣게 되어 거리에서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살가죽은 뼈에 달라붙어 장작처럼 매말랐구나.(Lamentations 4:7-8)”.


위의 예레미야의 ‘애가’에서 나타나는 바와같이 여기서 검다라는 말은 경제적 빈곤으로 피폐해진 이스라엘 사람들의 피골이 상접해진 모습을 표현했다. 그래서 이 가무잡잡한 피부가 거친 노동에서 그리고 빈곤에서 왔음을 가리킬때 이는 하얀 피부의 여성이란 개인적이고 성적인 아름다움이란 의미로부터 사회경제적 의미로 넓혀 해석하는게 더 이치에 맞는 듯하다.


모든 종교의 경전이나 일반 문학작품들도 그 당시의 문화나 사회상을 반영한다. 이슬람이나 그리스도교의 경전도 물론 마찬가지다. 두 종교에 나타나는 여성의 ‘하얀 피부’에 대한 선망과 이상화는 지리, 문화, 그리고 사회경제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남성지배하의 여성을 ‘남성이 보는(gaze)’ 관점에서 쓰여진 문헌이기에 이를 감안하고 해석해야지 문자적(literally)으로 그대로 일반화해서 하얀 피부의 여성을 선망한다고 해석하기엔 부족한 면이 많다. 그래서 이 사회경제적 관점에서의 피부색깔에 대한 해석이 더 유효한 것같다. 사실 한국이 옛날처럼 가난했다면 동남아 여성들이 한국 여성의 피부가 선망의 대상이 됐을까? 백인인 영국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넉넉해 지중해 연안이나 다른 열대지방으로 휴가를 갔다가 태운 피부를 자랑스레 보인다. 이는 ‘난 여유가 있어서 휴가갔다 왔다.’라는 말과 동일하다. 사람들은 또 이를 알아보고 어디갔다 왔느냐며 부럽게 묻기도 한다. 심지어 선탠하는 기계도 있지 않은가? 돈내고 피부를 태우는 것이다. 태운 피부는 이들에겐 사회경제적 신분의 징표가 된다.


어쨌든 여성의 '미'든, 예술에서 말하는 '미'든 ‘미(beauty)’를 가름하는 또는 비교평가하는 기준이 있을까? 몇년전에 가수 ‘마돈나’가 영국의 유명한 미술상인 ‘터너 상’의 그 해 수상 호명자로 나와 호명하기 전 몇분간 연설을 했다. 연설 중에 ‘어떻게 미를 가름하고 판단해서 상을 줄까?’하고 도발적인 말을 하며 막바로 듣기 거북한 욕을 생중계에서 했다. 물론 그 욕이 나올 때 방송사는 ‘삐’하고 재빨리 감추었다. 욕은 싫지만 그녀의 말은 수긍이 간다. 데이비드 흄도 ‘미(문학에서의)의 판단’에 관해서 일반적 판단은 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세세하게) 올림픽 게임에서처럼 금, 은, 동으로 가를 수는 없다고 보았다. 밀턴이나 셰익스피어처럼 위대한 문학작품은 보편적으로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하지만 또 '그렇고 그런' 평범한 시나 소설도 있다고 했다. 이들 작품이 다 똑같을 수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 미적판단은 필요하다고 했고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지 그는 제시했다. 그러나 판단은 항상 ‘주관적(subjective)’이다. 이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종종 말하는 영어표현에선 “미는 전적으로 보는 자의 몫이라고 한다(Beauty is the eye of the beholder.).” 이는 미는 객관적이 아니고 주관적이란 얘기다. 주관없이 그냥 남따라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에게 문제있다는 얘기고 남에게 보여주기위해 그런다면 줏대없고 자신을 낮추는 비굴한 행위이다. 외적 콤플렉스가 아닌 내적 콤플렉스가 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문제는 우리 개개인의 ‘판단’이 문제이다. 요한복음 7장 24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올바로 판단하여라(Do not judge by appearances, but judge with right judgment).”


사진: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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