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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Dec 24. 2017

하늘아래 키재기의 무료함...

독일 여행 에세이-쾰른 대성당의 동방박사

독일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대성당의 도시, 쾰른에 운좋게도 20년도 훨씬 전에 갔었다. 유럽에 도착하고 여름방학을 맞아 북유럽이냐 남유럽이냐를 두고 행복한 고민을 했었고 결국 북유럽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독일은 그 중심으로 잡았다. 나라 크기도 크기지만 그 땐 독일이란 나라가 통일된 뒤 몇년되지도 않았기에 관심도 많았고 독일 문학과 철학에 관심도 많아 직접 보고싶었다. 그러나 독일어 한마디 할 줄 모르는 멍뚱이었고 독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남유럽에 비해 물가가 비쌌다. 당시 그 흔한 카메라 한대도 없던 나였으니 얼마나 비용에 민감했을까. 그만큼 또 도전이었다. 가난한 학생이었던 난 '유로패스'를 구매하는 대신에 비용절감을 위해 ‘유로라인(Euro Line)’이라는 고속버스(Coach)를 이용했다. 유럽의 나라와 나라,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이 편리한 고속버스 시스템은 아직도 있으며(지금은 코치안에서 인터넷도 된다고 한다) 런던에선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에서 출발하였다. 나같은 가난한 학생에겐 이 고속버스가 유로패스보다 훨씬 싸고, 또 기차보다 느리지만 창밖을 내다보며 처음대하는 유럽 대륙의 신기하고 낯선 풍경을 구경하기도 좋았다. 하지만 한 두시간을 타는게 아니라 보통 대여섯 시간을, 가끔은 열시간 넘게 타기도 했다. 좁고 불편한 좌석에서 몇 시간을 버티다 보면 휴게소에 버스가 멈추었다. 대부분이 젊은이인 승객들은 고속도로 휴게실 화장실로 중고등학교 시절 선착순 벌을 받듯 우루루 달음질쳤다. 그리고 간단한 빵이나 샌드위치를 사서 요기로 때우곤 했다. 흔한 소니 워크맨도 없어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즐기는 여유도 못 가졌던 나는 버스 안에서 창밖의 풍경을 보는게 전부였다. 하지만 고백건데, 그래도 그때는 그게 마냥 좋았고 그런 불편함은 사실 안중에도 없었다.



암스테르담에서 쾰른에 당도했을 때는 오후 세시나 네시쯤이었다.  당시는 호텔은 꿈도 못 꾸었던 시절이었고 학생증으로 만든 ‘유스호스텔(Youth Hostel)’ 카드를 요긴하게 사용했고 유럽 각 도시의 유스호스텔에만 계속 머물렀다. 사실 유스호스텔은 호텔보다 훨씬 싸기도 했지만 세계의 젊은이들을 만날 수 있고 정보도 교환할 수 있는 유용한 곳이었다. 유럽 여러 나라중에서 독일의 유스호스텔은 정말이지 크고 깨끗했다. 호텔처럼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바(Bar)와 레스토랑은 물론 심지어 디스코 텍도 있었다(한번도 이용은 못했다…후회막심). 버스에서 내리자 말자 처음으로 내가 할 일은 공중전화 박스에 얼른 가서(핸드폰이 없던 시절. 결코 먼 옛날이 아니었다) 가이드 북에 나오는 여러 유스호스텔 중 가급적 시내에 위치한 유스호스텔로 전화해 예약하는 일이었다(인터넷으로 예약하는 요즘은 얼마나 편리한가…).



쾰른의 정거장에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배낭을 짊어진 채 전화로 달려가 시내 유스호스텔을 무사히 예약할 수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공중전화박스에서 나오니 한 한국인 커플이 얘기하고 있었다. 반가웠다. 우리는 인사를 했다. 난 괜한 친절함(?)으로 방금 예약한 유스호스텔을 얘기했다. 베낭을 짊어진 젊은이들이라 지레짐작으로 호스텔을 이용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곤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우린 호텔 예약했어요.” 그들의 ‘호텔’이라는 말에 알수 없는 진한 강세가 들어갔고 보이지 않는 우쭐함이 그들의 얼굴에서 수도물처럼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키가 비슷한 키의 이들이 나를 한없이 내려다 보는 것 같았다. 아하, 한 푼이라도 아껴야 이 한달간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는 나는 내게 남은 아주 조그만 자존심마저 상했다. 요즘말로 난 흙수저를 문 사람이었고 그들은 광채나는 금수저를 떡하니 물은 것 같았다. 난 왜 쓸데없이  친절함을 발휘해 유스호스텔을 소개해 주었을까? 친절함도 탈이야. 그러나 어찌하랴. 지금 생각하면 별것아닌 것가지고 상처받았던 것같아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쾰른 중앙으로 흐르는 라인강의 긴긴 다리를 무거운 베낭을 지고 걸으며 갑자기 터진 상처를 혼자 다독였다. 사실 내가 스스로 느끼는 것이었지 그들은 아무런 의미없이 사실을 얘기했을 뿐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에야 그렇지 그때는 아니었다. 생전 처음으로 본 라인강은 더욱 검고 깊게 보였다. 긴 다리를 힘들게 걸어 건너편 강쪽에 다다르자 놀랍게도 유스호스텔은 바로 강변에 있었다. 유스호스텔이 이런 명당 위치에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그 큰 규모에 또 감탄하였다. 리셉션에 가서 전화로 예약했다고 하면서 방을 배정받았다. 방이라고 해야 보통 6명에서 많으면 20명까지 한방에서 뒤척이며 잠을 자야하는 곳이 유스호스텔이다. 건데 이 유스호스텔은 너무 넓고 커서 방 찾기도 쉽지 않았다. 내방을 차찌 못했다. 그렇다고 꼬치꼬치 캐묻기도 해서 혼자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못찾고 다시 리셉션으로 돌아와 열쇠 번호를 보여주며 미안하다며 방위치를 다시 물었다. 이 젊은 독일인 리셉셔니스트는 퉁명스레 영어로 방향을 가리키며 방번호가 적힌 열쇠를 아주 내던지다시피 내 앞에 밀쳤다. 난 아주 기분이 상했다. 그 한국인 커플에게 상처받고 또 여기서… 이런게 인종차별인가 하는 생각도 머리속에 빙빙 돌아다녔다. 자금이 넉넉해서 호텔에 갔더라면 이런 수모는 당하진 않았겠지 하며 죄없는 집안을 탓했다. 대들려고 하다가 영어도 짧고 분하지만 참았다. 참으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사실 쾰른은 처음부터 뭐가 제대로 안 풀리는 곳이란 미신적인 생각도 괜시리 들었다. 액땜이라 치고 방을 찾아 짐을 풀고 샤워를 한 다음 걸어왔던 라인강에 턱하니 걸쳐진 그 다리로 다시 걸어 시내 구경을 갔다. 다리위에 올라 서자 웅장한 쾰른의 대성당이 강 건너에 우뚝 서 있었다. 아, 그때의 감동이란… 기분이 꽤나 언짢았던 나를 하늘을 찌를 듯한 대성당의 첨탑은 모든 걸 잊게 해 주었다. 높고 푸른 하늘과 대성당의 첨탑. 다리 아래엔 라인강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난 카메라가 없었기에 풍경과 감동을 가슴에 담아 둘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래서 그때 가슴에 담아 두었던 사진을 아직까지 꺼내 볼수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루에 두번이나 받은 작은 상처는 이 거룩하게 솟은 첨탑을 보며 다리 아래로 툭툭 털어 흘려보낼 수 있었다. 이곳에 와서 이렇게 대성당을 구경할 수 있는 것으로도 참으로 행복했다.


이 대성당앞의 그리 크지않은 광장에 다다르자 말자 한번 더 이 대성당의 규모에 그저 감탄 할 수 밖에 없었다. 최대 높이가 145미터이고 폭이 86미터라고 했다. 독일 가톨릭 쾰른(영어로 Cologne. 로마제국의 식민지라 '식민지'란 이름을 그대로 갖다 붙였다.) 대교구 주교님이 상주하는 주교좌 성당이라 한다. 그리고 이 대성당의 규모에 어울리게 성당 정면과 종탑에 걸린 종은 고딕 성당중 가장 크다고 한다.



이 성당은 모든 것이 하늘로 솟아 있다. 천상으로 향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만들어낸 걸작품이다. 성당 앞에서 쌍둥이 첨탑 꼭대기를 바라보려면 고개를 뒤로 충분히 젖혀야만 볼수 있다. 때마침 성당 정문 앞 왼쪽엔 플라스틱으로 만든 인공 나무가 있었고 가지마다 하얀 한지를 가지런히 접거나 종이접기 학을 달아 놓았다. 이 때는 8월 초반이었는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피해자를 위한 평화의 메세지를 적어 달아 놓은 것이었다. 성당안도 여느 대성당과 다르지 않게 크고 웅장했다. 성당 천장을 올려다 보느라 고개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이 성당은 1248년에 건축이 시작되었으나 완공을 못보고 1473년에 중단되었다가 겨우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원래의 건축도면에 따라 완공이 되었다고 한다. 완성 당시인 1880년엔 북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당이 되었다. 이 대성당은 프랑스의 아미엥(Amiens) 대성당과 많이 닮았고 다른 유럽의 고딕 성당들과 마찬가지로 스타일과 비율적 측면에서도 고딕성당의 룰을 따르고 있었다. 평면은 고딕 성당의 기본요소라 할 수 있는 라틴 십자가 형이다. 성당의 중앙제단(the High Altar)은 1322년에 축성되었고 약 4.6 미터로 검은 대리석으로 치장되었으나 정중앙과 측면은 백색 대리석으로 깔아 장식했으며 가운데 ‘성모님의 대관식(the Coronation of the Virgin)’ 성상이 서 있었다.


다른 유럽의 고딕 대성당과 마찬가지로 이 성당은 여러 미술품과 조각 그리고 보물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의 가장 유명한 것이 ‘동방박사 채플(the Shrine of the Three Kings)’이다.  이 채플은 쾰른의 대주교였던  ‘필립 폰 하인스버그(Philip von Heinsberg)’가 1167년부터 1191년 사이에 ‘베르둔의 니콜라스(Nicholas of Verdun)에 의뢰해 만들어 졌다. 내려오는 전통에 의하면 성서에 나오는 동방박사 세명의 유골을 여기 채플에 있는 유물관(reliquary)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원래는 이 동박박사 유물은 콘스탄티노플(지금은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었으나 콘스탄틴 대제의 윤허아래 밀라노의 주교였던 ‘유스토르기우스 1세(Eustorgius I)에 의해 밀라노로 옮겨왔고, 우리나라 서양사 책에도 꼭 등장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레데릭 바바로사(Frederick Barbarossa)’가 1164년 밀라노 침공시 획득해 쾰른의 대주교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뒤이어 독일의 오토 왕은 세개의 왕관(Crown. 동방박사가 왕으로도 알려졌다)을 수여했으며 쾰른의 공식 엠블렘(the Coat of Arms)에도 이 왕관이 들어가 있다. 그 후로 쾰른 대성당은 유럽 각지의 수많은 순례자들을 찾는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이 채플의 관은 바실리카 성당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은과 동으로 만들어 졌다. 관 바깥에 금도금을 입혔고 여러 화려한 장식이 보였다. 실지로 1864년에 이 관을 열어 조사했는데 다양한 유물과 동전도 나왔다고 한다. 이때 많은 이들이 목격했는데 뼈는 흰색 천으로 감싸져 있었음을 알수 있었다고 하며 이를 다시 관에 봉인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게 정말 동방박사의 유골인가는 많은 이들이 의심을 하고 있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추’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기호학자겸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 ‘바우돌리노(Baudolino. 읽어보지 못했다.)에서 이 동방박사의 유골관의 발견과 기증은 아주 교묘하게 조작된 12세기 최대 사기사건이라고 한다. 어쨋든 이 동방박사 유골관이 진짜인지 아니면 가짜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명의 동방박사는 누구일까? 그들은 여러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세명의 왕(the Three Kings), 세명의 현자(The Three Wise Men) 또는 ‘세 명의 마법사(the Biblical Magi)’로 불리기도 한다.  그들은 신약성서의 마태오 복음(Matthew 2:1–12)에 나오며 동쪽으로부터 왔다고 하나 그들에 대한 별다른 정보는 성서에 없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페르시아(이란)에서 왔을거라하며 조로아스터교(배화교) 사제들일거라 한다. 실지로 이들의 또다른 무덤이라고 알려진 곳이 사베(Saveh. 또는 예멘의 Saba)라는 테헤란 남쪽지방에 있다. 특히 중국을 견학한 마르코 폴로는1270년에 이 동방박사 무덤을 보았다고 전하고 있다(The Book of the Million, book 1).



중세때는 상상력을 발휘해 동방박사들이 각각 서로 다른 대륙에서 왔을 거라고 믿었다. 당시에 알려진 대륙인 즉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아시아에서 각각 왔다고 믿었다. 그래서 르네상스 회화나 조각에선 동방박사 중 한 사람은 검은 피부 한사람은 갈색 피부,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백인의 피부색으로 묘사하였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유대인은 아니며 먼 나라에서 왔고 베들레헴의 별(the Star of Bethlehem)을 따라 구세주의 탄생을 보러 멀리 팔레스타인까지 순례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회에서는 이들이 세명이라고 하나(아마 성서에 나오는 선물의 숫자와 동일해) 시리아 정교회(the Syriac Church)에선 12명이라고 믿는다.  또 이 세명의 이름도 알려졌는데 ‘멜키오르(Melchior)’, ‘카스파(Caspar, Gaspar, 또는Jaspar)’, ‘발다사르(Balthazar)이다. 이들은 페르시아, 인디아 그리고 바빌로니아에서 온 학자들이라고도 알려졌다.



최초의 르네상스 화가라 일컬어지는 14세기 초 ‘지오토(Giotto)’의 ‘아레나 채플(the Arena Chapel)’에 그린 이들 동박박사들을 보면 대충 중세인들은 어떻게 이들을 보았는지 짐작이 간다. 먼저 카스파는 타르수스(Tarsus. 지금의 터키 지중해 연안 항구)의 왕이며 황금을 선물한다. 그는 하얀 수염을 가지고 있으며 세 사람 중 가장 노인으로 그렸다. 타르수스는 무역항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그래서 재물이 많았던 곳이었다. 두번째로 멜키오르는 아랍 사람으로 보이며 중년이며 유향을 선물했다. 마지막 발다사르는 예멘의 사바(Saba)로부터 왔다고 믿었으며 셋 중에서 가장 젊다. 흥미 있는 것은 12세기부터 그려진 유럽 회화에서는 발다사르의 피부색이 시대에 따라 점점 검어지고 나중에는 예멘이 아닌 에디오피아에서 왔다는 설도 자연히 생겼다(또 다른 한 명은 심지어 중국에서 왔을 거란 설도 있었다.). 이는 특히 북유럽의 회화에서 두드러진다. 요즘도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첫 축일인 ‘주의 공현 축일(the Epiphany)’에 각 성당의 ‘구유 장식(Crib)’에서 이 세명의 동방박사 상을 갖다 놓는데 이 중세의 전통에 따라 발다사르는 항상 피부가 검은 아프리카인으로 나온다. 이 세명이 가지고 온 선물은 몰약(Myrrh), 유향(frankincense) 그리고 황금(gold)이다. 몰약은 보통 죽은 시체를 염할때 쓰였으며 종교적으로 인간 조건인 죽음으로 유향은 향으로 천상의 신(deity)을 그리고 황금은 지상의 왕 그리고 권력을 상징했다.


사실, 이 재미난 동방박사들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은 대부분이 후대에 덧붙여지고 전통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정확한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유럽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들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후대의 상상력으로 덧붙인 세 대륙에서 온 현자란 이야기는 그리스도가 만왕으로 세상에 오셨으며 유대인 뿐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왔다는 말도 된다. 또 그들이 들고온 선물의 종교적 영성적 의미도 중요하다.  이들이 어디에서 왔던 피부색깔이 어떻든, 중요한 것은 그들이 먼 나라에서 이 베들레헴의 별을 따라 그들의 지위도 명예도 재물도 다 버리고 이 별이 가리키는 곳으로 떠났다. 이 베들레헴의 별은 하늘에 떠 있는 별일 수도 있지만 영성적으로(spiritually) ‘진리(Truth)’를 가리킨다.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키 위해 이들은 산도 넘고 물도 건넜다. 낮과 밤으로 긴 사막을 걸으며,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보이는 것처럼 덩치 큰 낙타를 타고 터번을 두른 채, 먼 순례의 길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헤로데 대왕을 거쳐 구세주를 드디어 만났고 그들이 애써 가져온 가장 귀한 선물을 구세주께 바쳤다. 잠시 생각해 보자. 구세주를 베들레헴의 가장 미천한 마굿간 동굴에서 만나고 난 뒤 그들은 그들이 왔던, 즉 이미 알고있는 그 쉬운 길로 돌아 가지 않았다. 천사가 일러 준 대로, 다른 길로해서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들은 구세주를 보기 ‘전과 후’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이고 그들이 살던 방식이 아닌 새로운 길로 돌아 간 상징적인 의미도 깔려있다. 그래서 영어로 Epiphany(공현)란 단어는 ‘통찰 또는 깨달음’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구세주(진리)를 알고 뵈었다는 것은 통찰했고 깨달았다는 것도 된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고 겸연쩍은 20년전의 그 상처들은 사실 제대로 깨닫지 못한 나에게 있었던게 아니었을까? 그때 쾰른에서 한 한국유학생을  만났는데 그는 커피를 사주며 나에게 얘기했다. 쾰른 대성당을 제대로 보려면 성당 앞 광장에 드러누워야만 이 거룩한 대성당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다시 성당 앞으로 갔고 하늘을 보듯이 누워서(부끄러움도 없었다. 그 때는..) 대성당을 보았다. 대성당은 더욱 높아 보였고 그 만큼 하늘을 배경으로 한 성당은 거룩했다. 사실, 하늘을 배경으로 한다면 어디 거룩해 보이지 않는 건물이 있을까? 그 하늘 아래 높고 낮음을 따져 보는건 무의미하다. 다만 하늘을 배경으로 하지않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 높고 낮음에 연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난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더 낮아져야 더 많이 볼수 있다’는 진리를 말이다. 진위야 어쨌던, 쾰른 대성당에 누워있는 이 동방박사들은 한때는 권력있는 왕이기도, 기적을 일으키는 마법사이기도 또 현명한 현자들이기도 했다. 이런  그들이 모두 다 버리고 떠나 진리앞에 경배했던 이유를 우리는 가끔 되새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더 낮아져야 더 많이 보인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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