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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an 19. 2018

서쪽과 동쪽사이 그 예언자...

런던 에세이

예언자 요나는 겁쟁이였다. 우리와 똑같다. 하느님의 거룩한 명을 받고나자 덜컥 겁이 났고 멀리 도망가려고 했다. 정든 고향인 갈릴레아에서 하느님은 동쪽(정확히는 북동쪽)의 니느베(Nineveh. 니느웨)로 가라고 분부하셨다. 당시 니느베는 아시리아의 수도로 온갖 악(evil)의 소굴이었다. 악의 제국의 그 중심, 수도에 가서 죄에 갇힌 시민들에게 참회하라고 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예언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요나는 하느님이 명하신 그 반대방향으로 달아나려 했다. 갈릴레아에서 지리상으로 니느베의 정반대인 서쪽(정확히는 서남쪽)에 있는 '자파(Jaffa/Yafo. 야뽀)'의 포구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도망쳤다. 그는 멀리 타르쉬쉬(Tarshish)로 가려했다. 타르쉬쉬는 지금의 터키 서쪽 해안이라하기도 하고 또는 이탈리아 사르데냐 섬, 심지어는 지중해의 끝자락 스페인이라고 하기도 하는, 즉 학자들마다 각기 다른 의견을 내놓는 곳이다. 중요한 것은 요나가 당시 알려진 세상의 끝으로 가려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 끝으로 가며 하느님의 손길을 피하고 하느님의 명령에서 빠져 나오려 했던 것이다.


요나(Jonah)는 아미타이(Amittai)의 아들로 같-헤페르(Gath-Hepher) 출신이었다. 같-헤페르에서 약 5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남쪽에 예수님이 자란 ‘나자렛’이 있고 그보다 더 가까운 곳에 첫 기적을 행하셨던 ‘가나’가 자리하고 있다. 남쪽 베들레헴에서 태어 나시고 북쪽 나자렛에서 자라신 예수님은 어렸을때 이 지역 출신의 예언자이자 영웅인 요나 예언자에 대해 많이 들었을 것이다. 요나가 기원전 8세기 경 예로보암 왕(King Jeroboam. c.786–746 BC)시기에 활동했으므로 예수님 시기 약 800년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긴 세월이 지나도 나자렛을 포함한 갈릴레아 지방은 요나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을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서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자기 고향의 예언자인 요나에 대해 가끔 언급하셨다(마태오 12:38–41, 16:4. 루가 11:29–32). 그리고 요나만한 예언자가 없다고 치켜 세우셨다. 왜 그러셨을까? 고향 사람이라서?


예수님의 수난과 같이, 도망친 요나가 탄 배는 큰 풍랑을 만났다. 배의 선원들은 이 불행을 가져온 원인과 책임을 요나에게 물었다. 지금도 선원들 사이에서 ‘요나(a Jonah)’로 불리면 불행을 뜻한다고 한다. 선원들에 의해 요나는 풍랑의 제물로 던져졌다. (이 부분은 우리나라 고전인 인당수에 뛰어내린 심청전과 맥이 통한다. 그리고 '허만 멜빌'의 고래사냥 소설 ‘모비딕 Moby-Dick’에서도 도입부에 주인공이 요나에 대한 설교를 듣는 것이 나온다.). 이렇게 희생제물로 던져진 요나는 바다의 괴물(Sea Monster. 고래 또는 큰 물고기. 희랍어, 라틴 그리고 영어로의 번역이 조금씩 다르다)에 잡아 먹혔다.


요나는 꼬박 사흘을 그 고래의 배속에서 지냈다(요나 1:17). 건데, 왜 사흘일까?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렇다! 사흘 뒤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요나의 이야기를 예수님이 빗대어 자신의 수난과 부활을 복음서에도 예견하신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는 바티칸에 있는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화에 심판하는 그리스도 그림위에 요나를 그렸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적만을 바라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에게 요나의 사인(sign)을 직접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흘 뒤 요나는 컴컴한 어둠에서 빛의 세상으로 튀어 나왔다. 예수님이 컴컴한 동굴에서 빛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말이다. 요나는 이제 도망치며 세월을 허송한 신앙없는 요나가 아니다. '개과천선'한 것이고 새 생명을 얻었다.


‘아! 이 길이 아니었구나!’


요나의 ‘유레카’였다. 고래 배속 '전과 후'는 요나에겐 완전히 다른 삶이었다. 이 날이 요나에겐 ‘제 2의 생일’이었고 ‘새로운 탄생(born again)’이었다. 빛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요나의 ‘영세식(baptism)’이었던 것이다. 요나는 참회의 눈물로 끈적끈적한 고래 배속의 온갖 더러운 이물질을 씻어내었다. 그리고 이 ‘새(new) 요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 가 하느님이 명하신 바로 그 곳, 그 악의 소굴로 용기있게 들어갔다. 그 악 한가운데서 크게 ‘참회하라’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 나머지는 하느님이 알아서 하셨다. 기적이 일어났다. 니느베 시민들이 참회하며 재를 뒤집어 썼고 심지어 그들의 왕까지 참회했다. 놀랍고 놀라웠다. 이 기적은 ‘40일’ 동안에 일어났다. 40일간 예수님이 광야에서 단식하신 날수와 같고 가톨릭 교회력의 사순절(40일)과도 같은 날수다.


또, 이곳 니느베 사람들은 아시리아 인으로 요나와 같은 유대민족이 아니다. 이방인의 대제국인 아시리아에 작고 힘없는 민족 출신인 시골뜨기 유대인 예언자가 참회하라고 외쳤으니 뭔가 힘의 논리상 맞지 않는다. 수많은 우상들 속에 살아 온 니느베의 이방인들은 한때 고래에 먹혔던 유대인이 외치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언명에 귀를 닫지 않았고 들으며 참회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야훼를 모르는 이방인들이라 하더라도 마음 한구석을 열어 놓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신의 논리는 우리 인간의 논리로 해석하면 어불성설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논리론 이해하기 힘들다. 바로 여기에 신앙이 자리잡는다.


그러면 요나가 명령받은 미션(mission) 도시인 악의 소굴, 그 네오-아시리아의 최대 도시, 니느베는 어디에 있을까? 놀라지 마시라. 고대도시 니느베는 지난 십여년간 줄기차게 세계 언론에 언급되었던 곳, 이라크의 모술(Mosul)이다. 이곳은 북쪽 이라크의 티그리스 강(Tigris River) 동쪽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문제 많았던 부시와 블레어의 이라크 전쟁으로 자주 언급되었고 최근까지 악명높은 IS(Isis. 이슬람 국가)가 통치했던 도시다. 아직도 그 옛 궁전터는 남아있다고 한다. 가까이에는 유서깊은 성 마테오(St Matthew) 수도원이 있으며 시리악 전례를 따르는 가톨릭 교도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연 몇명이 살고 있을지? 이들 가톨릭 교도들은 2000년을 전세계에 흩어져 산 유대인들처럼 전 유럽에 난민이 되어 살아간다. 역사는 돌고 돈다. 2800년전 요나 시대에 그 악의 소굴이 다시금 악의 소굴이 되었다. 역사에 개입하시는 오묘한 신의 섭리가 이렇게 눈에 확 드러난다.


요나는 고향 갈릴레아에서 동쪽으로 즉 니느베로 가라고 분부받았는데도 반대방향 서쪽으로 도망쳤다. 이 세상 어디에서 그분을 벗어날수 있으랴? 높은 산에도 깊은 바다속에서도 하느님은 계신다고 시편작가는 노래했다. 요나처럼 덜 깨여진 몽롱한 우리는 하느님을 벗어날수 있다고 고집을 부린다. 우리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또 두려움으로 양심의 반대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터벅터벅 갔던 그 길이 그분이 분부하신 그 길이 아님을 결국에야 깨달은 그 순간은 요나가 어두 컴컴한 고래 배속에 있을 때였다. 그 어둠속에서 진정한 참회가 이루어졌다. 참회란 상징적으로 ‘나의 죽음’을 뜻한다. 이는 ‘나의 이기(ego)의 종말’이며 ‘나의 고집과 논리’가 창조주의 ‘큰 고집과 논리’에 종속됨에 기꺼이 순종한다는 뜻한다.


우리 마음속에 몰래 덮어놓은 두려움으로 가끔 우리는 많은 핑계를 만들어 낸다. 그 핑계는 우리의 말과 발을 움직여 내가 가야하는 정반대방향으로 끌고간다. 그래서 마음 열어 나의 두려움을 하느님 앞에 공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지금 나의 위치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위치를 모른다면 길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

또 어디로 가고 있을까?


혹시 나는 갈릴레아를 떠나 자파(Jaffa)로 내려가는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거기에서 세상 끝으로 가는 배위에 탑승하고 있을까? 다행히도 배를 탔다면, 세차게 몰아치는 '삶의 풍랑'에 직면하며 곧 선원들에 의해 바다로 던져질 위급한 상황에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인생 막장까지 와서, 고래 배속 그 어둠속에서 숨도 제대로 못쉬며 살아 온 인생을 한탄하며 참회의 눈물을 닦고 있을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요나가 서쪽으로 간 까닭을 안다면 그가 동쪽을 돌아 온 까닭도 알수 있으리라…


Photo:

-스테인드글라스 창, Jesus College, Oxford University(위)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채플 벽화, Vatican(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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