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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Feb 06. 2018

사랑할 선택과 미워할 선택...

런던 에세이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은 고통을 받을 것인가?

아님, 적게 사랑하고 더 적게 고통을 받을 것인가?"


이 질문은 햄릿이 던진 질문, '삶의 끈을 잡을 것인가, 아님, 놓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보다는 덜 심각한 질문같지만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올 수 있는 '선택'을 요구한다. 물론 선택이란 '딱 부러지게(clear-cut)'결정할 수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다만, 우리가 완전히 고통없이 살수 없다는 전제 아래 다가올 고통의 많고 적음을 예상한 나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리적으로 계산해서 한치라도 더 적은 고통의 길을 가려하는 게 우리 '인간본성'이라 믿는 이들도 많다. 그런 전제 아래 철학도 공리주의란 이름을 가진 학파 발생했고 현대의 우리를 지배하는 경제 이데올로기도 사실 집단과 개개인 모두 공리주의이다. 이는 이익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정해진 당연한 선택이기에 엄밀히 '자유의지'로 판단하는 선택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 적은 고통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만 있는게 아니다. 더 많은 고통이 오리라 예상하지만 '사랑'이라는 거룩한 이름아래 더 큰 고통을 각오하며 당당히 그 길을 선택하는 자들도, 많지는 않지만, 있다. 요즘 세상에는 이런 선택이 약간 이상해 보일수도 있고 어리석은 선택이라 볼수도 있다. 문학 작품속에서도 이런 유형의 주인공들도 많고 그래서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가끔은 신문에서 정상적 선택이 아닌 별난 선택이었기에 들려주는 그 뒷이야기도 있다.


선택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이 길을 가는 것과 저 길로 가는 길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사랑할 선택과 미워할 선택도 우리 자신에게 있다. 딱 부러지게 계산할 수 있는 공리주의 논리로 사랑은 해석이 안된다. 가끔 큰 사랑아래 큰 고통도 당당히 감수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이들에게서 인간본성의 신비함을 경험한다. 문학작품속 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그리고 공리주의 선택에서 얻을 수없는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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