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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Apr 03. 2018

인종차별 그리고 반유대주의

런던 에세이-영국 정치와 언론 그리고 사르트르

작금 영국의 야당인 노동당이 ‘반유대주의자(Anti-Semite)’란 공세에 몰려 있다. 어떻게 보면 때아닌, 인종차별의 원형이 되는 반유대주의(Anti-Semitism)란 수치와 불명예로 그것도 근대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고 자부심 큰 나라의 야당전체가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게다가 당수인 제레미 코빈은 히틀러와 같이 차안에 앉아있는 합성사진까지 만들어졌고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유명인이자 성공한 사업가로 BBC의 ‘도제(apprentice)’란 프로그램으로 유명세를 탄 ‘알란 슈가’ 경이 트윗했을 정도이다. 지금은 트윗에서 결국 내렸지만 그 반 유대주의 공세의  여파는 컸고 노동당에 대한 공격은 갈때까지 간 모양새다. (참고로 알란 슈가 경은 특유의 직절적 화법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도널드 트럼프가 이끈 미국 tv 프로그램의 영국판인 이 ‘도제’에서 비즈네스를 꿈꾸는 야망의 젊은이들에게 직접적 멘토역할과 사업 파트너 뽑기식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Lord’란 그의 칭호가 말해주듯 영국인에게 많이 알려졌고 18년간 영국 노동당을 지지하고 후원했다. 하지만 제레미 코빈이 당수로 선출되자 노동당 지지를 철회하였다.)


문제의 제레미 코빈은 노동당 당수로 기적처럼 몇년 전 당선된 사람이다. 35년간 노동당 국회의원이었으나 그는 무명의 백벤치(Back Bench. 영국의회의 좌석배치에서 뒤에 있다. 당내에서 중요 보직을 가지지 않은 일반 의원이며 힘못쓰는) 의원이었다. 그가 당수로 당선된 뒤에야 그의 이름도 일반에  알려졌고 특히 ‘골수좌파’ 이력이 화제가 되고 논란도 많았다. 영국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니? 하고 다들 놀랐다. 그의 좌파적 철학은 노동당 당수 당선후 줄곧 따라다니며 논란을 계속 만들어 내었다. 그런만큼 온갖 루머에 시달리기도 했다. 예로들면, 그가 빨갱이로 냉전시대에 소련 스파이와 접촉했다고 옛 체코 스파이의 인터뷰땜에 한참 시끄러웠고 아일랜드 공화군(IRA)과 악수하고 사진찍은 모습도 크게 보도되고 어떻게 테러리스트들과 한통속이냐며 비판자들은 거품을 물었다. 최근에는 러시아 스파이 약물테러에서 러시아에 대한 비난을 영국국회에서 자제(?)해 물의를 또 빚었다. 누구나 다 러시아가 범인이라며 비난하는 거대한 물결속에 혼자서 좀더 진상파악을 해보자고 했다. 러시아가 진짜 그 약물 테러주범인지 확인 한 다음 조치를 취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를 따라다니는 골수좌파의 이미지답게 금방 ‘러시아 옹호’로 언론은 직설적으로 보도했다.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몰아붙이는 언론의 속성은 한국이나 영국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는 언론에 비치는 그의 이미지땜에 자신의 본질은 그게 아니라며 항변했지만 굳어진 이미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언론의 이미지에 걸맞게 그의 정책 노선은 토니 블레어와 에드 밀리밴드의 노동당 정책과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 그래서 노동당 내부에서도 그를 못마땅해하는 당원들엄청 많다. 심지어 그를 당수에서 끌어내리려는 공모와 시도도 여러번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수모도 견디며 지난 선거에서 노동당이 표를 많이 얻어 건재를 과시했다. 반면, 그의 좌파철학땜에  대학생들과 젊은층엔 부동의 인기를 얻고있으며 인기도 연예인 이상이다.


그런 그의 좌파 정책은 중동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보통 정치인과 다름이 확연히 드러난다. 특히 이스라엘의 억압정책으로 그 희생자인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을 그는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 솔직하다. 그래서 그의 정책은 좌파답게 억압받는 약자, 민중의 편이다. 그런고로 언론에서의 그의 이미지는 팔레스타인인의 인권과 자유를 옹호함에 따라 자연히 이스라엘엔 ‘반대’로 쉽게  선을 그어버린다. 그들에겐 ‘친’ 팔레스타인이면 ‘반’ 이스라엘이다. ‘흑백’으로 가르기 좋아하는 언론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대부분 영국 사람들은 내가 남한 사람이기 때문에 다들 북한은 나의 적으로 믿어버리고 내가 북한 사람들을 ‘철천지 원수’로 생각하는 줄 아는 그런 단순논리와 순진함이다. (‘원쑤’는 싫어하되 ‘원수(적)’을 사랑하는 게 그리스도의 가르침 아닐까?)


하여튼, 제레미 코빈은 일반 정치인과 좀 다른것 같다. 대부분의 영국 정치인은 이스라엘 편이며 그 이유로 ‘반 테러리즘’을 들고 있다. 그러면서 고통받고 힘없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동정하며 구호물품과 물자를 ‘휴머니타리언’입장으로 보내기도 하는 선한(?) 정치인들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정확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어느쪽 편에 선다고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부분이 이스라엘 편이다. 엉큼하다. 왜냐하면 국가 이스라엘은 그냥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전세계 유대인들의 마음의 고국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당한 유대인들이기에 유대종교를 믿는 유대인이든 세속 유대인이든 이스라엘은 유대인 가슴속에 항상 존재한다. 미국이든 영국이든 정치인들과 정당의 정치자금은 국가 이스라엘이 아닌 미국과 영국의 부유한 유대인들로부터 많이 들어 온다. 그게다가 정치자금만큼 중요한 것은 언론이다. BBC를 비롯한 방송과 영국의 유수한 신문들에선 영향있는 편집자들과 기자들의 많은 수는 유대계이며 그들은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영향력이 있다. 그들만큼이나 인도계나 무슬림계도 영국사회 곳곳에 영향력을 발휘한다. BBC에서 영향력이 큰 시사 프로그램인 ‘Newsnight'도 연출가(PD)가 유대계이며 서너명의 진행자중 한명도 유대계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대계 영국인이라해서 그들이 이스라엘의 이익을 ‘직설적’으로 옹호하고 대변한다고 보진 않는다.


문제는 언론의 속성이다. 실제 정치행위는 인문학이 아니지만 언론이 정치행위를 보도하고 특히 그 과정에서 ‘해석’을 담는 것은 ‘인문학적’이다. 정책도 법처럼 해석 나름이고 정치인의 이미지도 해석 나름이다. ‘본뜻은 그게 아니다’ ‘왜곡되었다’ 라고 끊임없이 침튀기며 응변하는 것은 미투의 가해자뿐 아니라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한 정치인의 ‘이미지’란 엄청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책뿐만 아니라 이미지에 따라 표를 꾹 눌러버리는 유권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는 보통 언론이 생산해내고 퍼뜨린다. 무색의 ‘본바탕’에다 색깔을 입히는 것이 바로 언론이다. 우리나라의 조중동에서 좋아하는 ‘빨간색 입히기’가 그 적절한 예다. 그리고 그 색깔 덧칠하기에는 항상 ‘연상작용’을 이용해 ‘카피와 페이스트(copy and paste)’로 ‘짜깁기’를 한다. 영화이론에선 이걸 ‘몽타주 이론’이라하며 이로써 카메라가 그짓을 수행했다는 것을 관객이 잊게 만들어버리는 ‘봉합(영 stitch. 불 suture)’을 한다. 이것과 저것 갖다붙이기를 해서 짜깁기를 하면 훌륭한 한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듯 이미지 덧칠하기와 한컷 한컷 짜깁기와 봉합을 하다보면 대중의 머리속 선명한 한 정치인의 이미지가 형성된다. 우리가 아는 셀레브리티나 정치인들은 이런 언론의 이미지 덧칠하기와 봉합의 결과물을 우리가 접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제레미 코빈이 팔레스타인 인들의 인권을 외친다면 ‘반 이스라엘’로 당장 연상작용으로 연결되고 또 ‘반 이스라엘’에서 ‘반 유대주의’로 곧바로 연결된다. 그래서 알란 슈가 경처럼 히틀러와 제레미 코빈의 합성사진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국가 이스라엘과 영국에 사는 유대인이란 별개라고 항상 강조하면서도 그렇게 이미지 덧칠하기는 연상작업을 이용한 짜깁기와 봉합의 프로세스로 생산된다. 이 과정이 복잡한 것같지만 사실 단순한 흑백논리다. 빨갱이(?) 철학자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렇게 단순하게 이리저리 연결시켜 덧입혀진 이미지를 반복 재생산하고 퍼뜨려 이슈와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이를 증폭시킨다. 그리고 시청률이나 신문의 부수는 올라간다. 여기서 ‘퍼뜨리는’ 힘은 보통 자본을 대동한 가진자의 힘(power)으로만 과거엔 가능했지만 지금은 세상이 좋아 자본없고 힘없는 개개인들도 힘을 합쳐  ‘소셜네트워크(SNS)’를 통해 자본의 고유한 권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제레미 코빈은 그래서 ‘불행아’이자 ‘행운아’다.


언론의 이미지 덧칠하기의 밑그림은 골수좌파인 제레미 코빈이 당을 이끌자 자연히 좌향으로 기울어진 가까운 자기쪽 인사들을 섀도우 각료들이나 중요요직을 맡기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정치나 사회나 그렇고 그런 것이다. 그들 중에는 반 유대주의 인물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언론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들을 원본색출하고 뿌리를 뽑아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좌향의 인물들 이력과 철학은 가끔 노동당의 아킬레스 건이 되었다. 영국 보수당에서 가끔 ‘숨어있는’ 골수우파의 행적땜에 피해를 보는 것과 같은 예이다. 그런 와중에서 알란 슈가 경의 트윗에서 히틀러와 제레미 코빈의 합성사진까지 올라온 것이다. 제레미 코빈도 이를 잘 처리하지 못하면 그의 자리도 위태로울 것이다.


그러면 히틀러는 누구인가? 아리안 민족을 최고로 내세우며 유대인들을 6백만명이나 학살한 흉악한 범죄자가 아닌가? ‘우향’의 극단쪽에 히틀러는 서있고 같은 쪽에 미국이나 영국의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자리한다. 반대로, (언론이 부각시키려는) 제레미 코빈은 그 정반대쪽인 골좌파인 ‘극좌’쪽에 위치해 있다. 어떻게 ‘극좌’와 ‘극우’가 나란히 같이 서 있을 수 있을까? 히틀러와 제레미 코빈이 같이 앉아있다는 것은 한가지 사실(공통점), 즉 ‘반 유대주의’때문이다. 이로써, 극우와 극좌는 화해(?)한다는 것일까? 이건 남과 북의 화해만큼, 북한과 미국의 화해만큼, 인도와 파키스탄의 화해만큼 기적일 수있다. 건데 그들은 도대체 양립할 수 있을까? 한가지 사실은 극우든 극좌든 그들의 ‘방법론’은 엇비슷하다는 것이다. 한 대상을 공격하는 ‘증오의 선동’이란 그들의 보이지 않는 행동요령은 안타깝게도 양쪽 다 똑같다. 그렇지만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라서 잠시 숨을 고르고 “누가(who)” 더 이성적(rationally)인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고통받는 팔레스타인 이들을 외면한 국제사회, 특히 서구의 정치인들 중에 고통받는 이들의 인권을 ‘눈치 안보고’ 외친 이들이 과연 있었는가? 장장 반세기가 넘는 동안에… 팔레스타인인들의 인권과 해방을 지원하면 ‘반 이스라엘’로 낙인 찍혀버릴까 겁내서 눈치보는 정치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면서 ‘반 이스라엘’을 ‘반 유대주의’로 금방 치환시켜버리는 단순한 사고를 가진 자들은 누구이고 그들은 어느 시스템에 속해 있을까?


언론이든 개개인이든 ‘이미지’와 ‘연상작용’은 엄청 중요하다. ‘극우’와 ‘극좌’를 같이 배치시키는 것도 이렇게 실제로도 가능하다. 무섭다. 덧붙여, 공포스러운 것은 이미지와 연상작용으로는 어떤 것도 조작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이미지는 이렇게 조작과 해석으로 생기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이미지도 ‘색’을 덧칠하여 반복, 재생 그리고 복제되어 퍼지면 전혀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그렇게 증오했던, 그 놈 악마의 머리속 유대인의 이미지도 사실 당시에 퍼져있었던 ‘조작되고 날조된 유대인 상(이미지)’을 히틀러 자신도 또 독일인들도 ‘사실’이라 믿고 따랐던 것이다. 거기엔 증오가 숨어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6백만명의 유대인 학살이 있었던 2차대전이 끝난  그 다음해인 1946년 사르트르는 그의 글, ‘반유대주의와 유대인’을 썼다. 이미 늦어버린, 그러나 광기가 지난 뒤 폐허의 잔해속에서, 그 충격의 여진이 손에 움켜 쥔 펜과 종이밑 책상위로 아직 감지되던 해에 손떨며 쓴 그의 글이었다.


“만약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반 유대주의자는 유대인을 발명해낼 것이다(If the Jew did not exist, the anti-Semite would invent him).”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비이성적인 욕망으로 시작된 ‘덧칠하기와 짜깁기 그리고 봉합과 퍼뜨리기’는 어느 누구든 그 대상이 될수 있고 어느 누구든 그 증오의 시스템에 가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건 인간의 자유와 선택이라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에 그 원리를 두고있다. 그는 이 에세이에서 가짜 이미지에 근거를 두고 그걸 핑계와 고발로 삼는 비이성적인 증오는 뭔가 심리적으로 불안한, 하이데거의 ‘다자인(Dasein: being there)’처럼 세상에 툭 내던져 진 연약한 ‘인간’, 개개인의 불완전한/잘못된  살아남기의 방편이며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의 인간학에서 자유뿐 아니라 ‘선택(choice)’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선택에서 ‘의무(responsibility)’의 윤리를 끄집어 내고있다. 자유로이 선택하면 책임 또한 엄중히 져야 한다는 논리이다. 우린 완전한 자유를 가졌고 선택할 수 있지만 우리 행동에 대한 책임은 선택한 우리에게 있다.


혹시 영국 언론은 그들이 ‘보고싶어하는’ ‘별종’ 제레미 코빈의 이미지를 그의 본그림위에 여러 색으로 색칠하는게 아닐까? 혹시 ‘우리 모두’는 귀가 솔깃해 그런 색색의 칼라풀한 그의 이미지에 ‘혹’해서 따라가는 우매한 대중은 아닐까? 중요한 사실은 그 덧칠한 ‘이미지의 거울’ 앞에 선 우리에게 어른거리는 거울속 그림자는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닐까? 우리의 욕망이 비추어진 거울을 과감히 깬다는 것은 진실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사르트르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반유대주의자는 자기 목적을 위해 유대인을 창조하며 창조된 그 유대인은 그가 혐오하는 모든 이이다(The anti-Semite creates for himself a Jew that is representative of all that he loathes).”


혹시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적'은 바로 나 자신이 창조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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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파리 시내 유대인 박물관으로 들어가면 바로 정면에 이 작은 조각이 있다. 쾡한 눈과 메부리코는 유대인을 묘사했으며(유럽인이 보아왔던 차별적인 유대인 묘사) 벗겨진 머리로 그들의 우수한 지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고요히 내면으로 사색하는 작품의 모습은 그들의 고통과 차별의 역사를 침묵으로 그러나 강렬하게 드러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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